품계석뒤로 도열한 대신들, 고개 숙인 문무백관 사이로 등장하는 장엄한 임금의 행차. 현대인들이 떠올리는 궁궐의 모습은 이 정도가 아닐까.
그러나 서까래, 돌담 하나에도 삶의 애환이 얽혀 있는 필부의 초가집과 마찬가지로 궁궐 역시 왕족과 주변 사람들의 '집'이었음을 우리는 잊고 있는 듯하다. 이런 점에서 옛 사람들의 주거공간을 이야기하자면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에 위치한 창덕궁을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 불타 대원군이 중건할 때까지 궁궐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경복궁에 비해 창덕궁은 조선 270년간 13명의 임금이 살았던, 왕족들의 실제 삶이 묻어 있는 궁이기 때문이다.
정문인 돈화문(敦化門)부터 임금이 만조백관과 조회를 하던 인정전(仁政展), 집무를 보던 선정전(善政展)까지가 외전(外展).
장엄하다 못해 위압적이기까지 한 외전을 벗어나 선평문(宣平門)을 거쳐 내전(內展)에 들어서면 정남향으로 앉은 ㅁ자형 건물에서 아담한 살림집이란 느낌이 우선 든다. 만백성위에 군림하던 제왕의 주택이라기엔 너무나 검박하기 때문이다. '왕도 인간'이라는 생각이 불쑥 스친다.
하지만 내전을 알아갈수록 첫 느낌은 문외한의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너무나 잘 다듬어진 조화미에서 오는 안정감이 주는 것일 뿐 평민들의 주택과 다른 구석이 한두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도된 평범함속에 비범함이 번뜩인다고 할까.
먼저 13만1천781평에 달하는 규모가 압도적이다. 흔히 비원(秘苑)으로 불리는 내전의 후원만 9만여평. 궁중 살림살이를 맡은 궁녀 수가 6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상주 인구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도 과하지 않은 규모다.
내전의 중심은 왕비가 기거하던 대조전(大造殿). 기와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붕 꼭대기의 돌출된 선 '용마루'가 없는 것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덕분에 단호한 느낌의 一자형 지붕대신 암키와와 수키와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곡선의 조화가 절묘하다.
이곳은 임금이 왕비를 찾아와 눕던 곳. 임금은 하늘아래 거칠 것이 없다는 뜻에서 혹은 용(임금)이 눕는 곳이기 때문에 용마루를 얹지 않았다는 설명이 따른다. 눈길을 끄는 왕과 왕비의 침전.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온돌' '서온돌'로 불리는 큰 방이 하나씩 있다. '하늘에는 별도 많고 지밀(至密)에는 방도 많다'는 옛말처럼 침전은 수많은 방들로 둘러싸여 독특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른바 침전 하나를 8개의 방이 둘러싸고 있는 우물 정(井)자 구도.
한가운데 방에 왕이 침수(寢睡)하면 둘레 여덟 개 방에는 노(老)상궁들이 잠든다. 임금에겐 현대인들이 말하는 '프라이버시'는 없었던 셈.
이런 구조는 암살 위험때문에 생겨났다. 실제로 을미사변당시 일본인 폭도들이 습격했을 때 민비가 장지문 사이로 이방 저방 옮겨 다니는 바람에 민비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대조전은 지난 1917년 화재로 불탔던 것을 재건한터라 본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마루방을 포함해 6개의 방이 둘러싸고 있다. 방바닥도 일반 집 구조와 다르다. 바닥에서 2인치정도 공간을 두고 판을 깔고 그 위에 다시 장판을 하는데 옥체에 덥고 찬 기운이 직접 닿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대조전을 둘러싼 긴 행랑을 훑어 내려가다 보면 수라간이라 불리는 부엌을 발견할 수 있다. 기웃거려 보니 의외로 하얀 타일을 깐 현대적 입식 부엌이 보인다. 이 역시 화재후 새로 지으면서 신문물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수라간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았지만 부엌옆에 다닥다닥 붙은 네 개의 방엔 왕실의 행사때 음식을 준비하던 궁녀들의 부산함이 배어있는 듯하다.
창덕궁에는 이처럼 전등, 차고 등 신식 문물을 받아들인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중 하나가 화장실. 현재 이곳에는 세 개정도의 화장실이 남아 있다. 모양은 좌변기지만 수세식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왕의 용변을 받아내던 도구인 매우(梅雨)틀을 변형한 정도. 궁안에는 궁녀들이 사용하던 6개의 여성용 화장실이 있었다고 하지만 불타버려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궁궐의 엄격한 법도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하려 했던 24대 헌종(1827~49)의 애틋한 사랑이 배어 있는 낙선재를 지나면 공예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부용정이 자리잡은 후원.
이제는 모두 떠나고 관광객만 찾는 이곳, 장엄한 건축물들만이 말없이 증명해주고 있는 오백년 조선왕조의 영화가 늦봄 부용지 위로 지는 꽃처럼 허무하다.
〈글 ·金嘉瑩기자, 사진·李京勳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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