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플럭서스'

무더웠던 1963년 7월 독일 쾰른의 즈비르너화랑. 문화와 조각을 논의하는 자리에 요셉 보이스는 돼지기름 덩어리를 전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름덩어리는 녹아내려 작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형태가 변해버렸다.

1962년 독일 비스바덴. 조지 마시어나스를 비롯한 일단의 연주자(?)들이 등장한다. 길지 않은 침묵후 이들은 망치를 꺼내들고 난폭하게 피아노를 내리친다. 기존의 '음악'은 들을 수 없다. 연주장에 울리는 것은 비명같은 피아노 소리뿐.

'미술' 혹은 '음악'하면 당신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혹시 풍만하다 못해 터질듯한 엉덩이를 가진 분홍빛 살결의 나부(裸婦), 아니면 잘 차려입은 근엄한 표정의 연주자들이 만들어 내는, 졸기 딱 좋을 정도의 음향은 아닌지.

1960년대 미술·음악·문학 등 예술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반예술적 전위운동 '플럭서스(Fluxus)'는 이러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에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그 영향력에 비해 플럭서스를 기억하는 일반인은 많지 않지만 그것은 '무엇으로도 정의될 수 없었던' 플럭서스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조직·목적 등 어떤 것도 규정하지 않았던 플럭서스는 양식이 아닌 하나의 심리 상태며 조직적 모임이기보다 아웃사이더들의 지극히 자유로운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흐름' '끊임없는 변화'를 뜻하는 플럭서스는 조지 마시어나스가 창간하려다 실패한 잡지의 이름. 1963년 뉴욕 소호에 본부가 창설되면서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모임의 자유로운 성격만큼이나 참여자들의 국적·장르도 다양하다.

창시자인 마시어나스를 비롯 독일의 요셉 보이스·백남준, 미국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잭슨 맥로우·조지 브레히트, 프랑스의 로베르 필리우·에메트 윌리엄즈, 일본의 오노 요코 등. 예술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모든 분야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이들의 가장 큰 업적은 예술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것.

고상하고 정형화된 예술을 거부, 당시 애호가들을 경악케 했던 해프닝·퍼포먼스가 플럭서스 활동의 지향점이었다.

1965년 백남준과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이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벌인 '로봇 오페라'는 사법당국에 의해 금지됐을 정도. 여자 로봇은 군중사이를 누비며 노래를 부르고, 백남준은 선언문 '대중예술을 죽여라'를 뿌렸다.

'아리아가 있는 오페라는 시시하다/아리아가 없는 오페라는 지루하다/카라얀은 너무 바쁘다/칼라스는 너무 시끄럽다/(중략)/마약은 너무 지루하다/섹스는 너무 시시하다'. 선언문의 내용은 플럭서스의 단면을 보여준다.

음악은 또 어떤가. 라 몬테 영의 1960년작 '헨리 플린트를 위한 566'은 566개의 피아노 음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같은 크기로 연주한다. 맥로우와 로빈 페이지의 '기타 소품'에서는 연주자들이 기타를 바닥에 내던지고 계속 발로 차서 무대 아래, 극장 밖의 일정 장소를 돌아 다시 무대로 돌아오는 행위가 곧 연주다.

그들은 왜 이런 작품활동을 벌였을까. 흔히 예술은 인생이라지만 보통 사람은 흉내조차 힘든 테크닉을 사용한 그림, 음악이 어째서 우리의 인생인가에 그들은 의문을 품었다. 즉 예술적 의도는 인위적 성격과 부자연스러움을 내포하므로 오히려 '반예술=인생'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모든 의도된 예술형태에 반대했다.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기교가 아닌, 우리 생활과 현실에 뿌리내린 예술을 구현하려 했던 플럭서스의 활동은 요셉 보이스의 이 한마디에 축약돼 있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입니다"

〈金嘉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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