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아이는 지금 중학생이다. 한창 꿈 많고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에 접어들어 앳된 모습으로 발랄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노라면 혈육의 정이 강하게 솟아 오르는 것을 느낀다.
내가 관여하고 있는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에서 자주 만나는 김할머니. 술을 한잔 하시면 옛날 이야기를 자주 하신다. 올해 78세인 이 할머니는 60여년전 친구와 나물 뜯으러 마을 뒷산에 갔다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그때 나이 16세. 지금 내 딸아이 또래였다. 김할머니의 부친은 꽃처럼 예쁜 딸을 끔찍이 사랑했었다고 한다. 딸이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자 부친은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김할머니가 놀던 산으로 올라가 애타게 찾곤 했다한다.
그 형언하기 어려운 아버지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더우기 금지옥엽 키운 딸이 일본군의 성노리개가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속만 태우다 얼마후 불과 40세의 나이에 화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딸을 둔 아버지로서 그 미칠 것만 같은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할머니는 대만으로 끌려갔다 다시 마닐라로 이동되면서 일본군인들의 성노예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온갖 고초를 겪게 된다. 전쟁이 끝난후 일본군 주둔지에 있던 수 많은 여성들은 억울하게 죽거나 돌아오지 못했지만 처지를 딱하게 여긴 한 일본군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귀국하게 된다. 그후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할머니는 결혼도 하지 못한 채 아픈 몸을 추스리며 홀로 살아 왔다.
열여섯. 그 어린 나이에 먼 이국땅으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던 우리의 할머니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그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렸고, 그분들은 아무 잘못이 없으면서도 마치 죄인인양 수십년간 남모르는 고통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광복의 달 8월이 되면 나는 54년전 해방의 감격속에 묻혀버린 할머니들의 고통스러운 과거와 현재를 다시금 떠올린다. 그리고 사랑하는 내 딸아이를 보며 그 어린 나이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을 할머니들을 생각하며 분노하게 된다.
이제 더이상 흘릴 눈물도 말라버린 그분들의 노후를 조금이라도 편케 해드리는 것이 그동안 우리 모두의 잘못을 만분지 일이라도 속죄하는 길이라 믿는다.
곽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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