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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일왕의 방한

21세기에는 한국과 일본이 지리적·경제적 이유로 동반자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의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후 54년이 지난 지금도 그 어두운 과거는 여전히 한·일관계에 음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있어서의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정부는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두고 일본 왕을 초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현재 상황에서 일본 왕의 방한에는 커다란 걸림돌이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일왕이 한·일간에 청산해야할 과거사의 상징적인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일제 35년간의 식민통치 당시 일어났던 종군위안부문제, 징병징용문제, 민족말살정책 등 각종 만행이 일왕의 이름으로 자행되었고 과거사가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의 하나가 바로 일본의 천황제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과거의 범죄를 인정하는 것은 곧바로 왕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되며, 이것은 지금도 천황제에 의지하고 있는 일본의 지배구조를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일본정부를 포함한 지배층은 과거청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종군 위안부 피해자를 비롯한 여러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다. 그리고 지난 해 유엔인권소위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만장일치로 채택된 '맥두걸 보고서'는 일본정부가 배상은 물론이고 범죄자 처벌도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패전 후 왕이 유일하게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한반도를 방문하게 된다면 자칫 한국은 물론이고 널리 아시아국가들에 대해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들 한다. 21세기의 진정한 동반자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당장 눈 앞의 경제적 실리 보다는 과거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 등이 이루어진 후 왕을 초청하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필자로서는 우리 정부의 일 왕 초청 움직임과는 달리 평생을 고통과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피해 할머니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곽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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