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어느 날, 한국 대구의 이조성씨 가정에 큰 사진 뭉치를 든 중매장이가 찾아 들었다. 각각 20세·18세된 두 딸을 '세상에 비길 데 없이 좋은 혼처'인 하와이 신랑들에게 시집 보내라고 권하려는 것이었다. 언니는 묵묵 부답이었으나 동생 희경이 나섰다. "하와이에 가면 내가 다닐 수 있는 대학이 있을까요?"
이렇게 해서 희경은 신랑감들의 사진 중 하나를 골라, 다른 많은 '사진 신부'들과 같은 배를 타고 분홍 치마 저고리를 입은 모습으로 그해 10월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러나 권도인을 따라 도착한 펀치볼의 그의 거처를 보는 순간 이희경은 엄청난 실망에 빠져 들었다. 단칸방은 고향집 하녀 것 보다 못했고, 벌이는 형편 없었다. 때문에 그후 혼자 있을 때 마다 "내 운명이 왜 이렇게 돼 버렸나?"하고 울부짖어야 했다. 대학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당시 24살의 권도인은 마노아 계곡의 한 사업가 집 하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주인집 노는 땅을 빌려 채소를 경작, 점차 자립에의 길을 모색하는 중이었다. "나는 안동에서 농사일을 거들다 하와이 이민으로 새 인생을 개척하려고 1905년 2월 17살의 나이에 이곳에 도착했소. 그 직후인 6월엔 하와이 이민 길 조차 끊겨 버렸소". 젊은 부부는 그들이 1910년부터 본격화된 일본의 압제를 벗어난 것만으로도 다행해 해야 했다.
권도인은 이민 후 한달에 16달러씩 받고 4년간 사탕수수 밭에서 힘든 일을 하다가 "여기선 희망이 없다"고 판단, 도시인 호놀룰루로 나섰다고 했다. 친구들이 얻은 도시에서의 직업도 거의가 하인이나 세탁소 조수 같은 것이었다.
이희경에겐 일요일에 한인 감리교회에 가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같은 말을 쓰는 동포를 만날 수 있고, 서로 의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만난 다른 사진 신부들의 얘기 중에는 더 슬픈 것도 있었다.
그 뒤 권도인은 친지 소개로 가구회사로 일자리를 옮김으로써 앞으로 그의 인생을 반석 위에 올려 줄 새 직업의 세계로 진입했다. 또 이희경은 하와이 도착 2년만에 첫 아이를 낳았으니, 그가 이 책을 쓴 맏딸 권정숙이다.
이때쯤 이희경은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한 '감리교 부인 구조회' 활동에 열심이었다. 당시 이민자들 중에는 직업을 못 구해 가난한 가족이 많은 만큼 이 모임의 활동은 헌신적이었다. 부인이 아픈 가족, 출산부 등도 서로 돌봤다.
이희경이 활동한 또 다른 한 단체는 '영남 부인회'였다. 경상도 출신 사진신부들이 회원으로, 상호 부조 외에도 또 다른 목적을 갖고 있었으니, 그것은 조국의 독립이었다. 회원들은 어느날 널리 퍼진 한 소문을 들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한국인의 강인성과 단결력을 보임으로써 독립을 쟁취하려는 대규모 시위 계획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회원들은 자신들도 이 조국내 시위에 참가키로 선언했다. 그러나 자금 부족을 깨달은 뒤엔 대표를 파견키로 했으며, 이 소식을 듣고 하와이 한인 사회는 힘들여 번 돈을 여비로 모아 내 놓았다. 파견 대표는 이희경이었다.이희경은 1918년 7월 중순 출발하면서 당시 세살 박이던 딸 권정숙을 데리고 갔다. 이들 모녀가 다시 하와이로 돌아 온 것은 3년 뒤였다. 대구역에 마중 나와 있던 친정 모친은 이희경을 끌어 안고 오랫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도착 일주일쯤 뒤부터 이희경은 딸을 친정에 맡겨 놓고는 자신의 임무와 관련된 인사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하더니 가을엔 아예 서울로 가서 이화여대에 등록하고 눌러 지냈다. 만세운동 준비 때문이었다.
해가 바뀐 1919년 3월에 3·1운동 소식이 전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했다. 희경은 시위 중 붙잡혀 감옥에 있음이 확인됐으며, 10여개월 뒤인 1920년 1월에 석방돼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임무 때문에 곧바로 하와이로 되돌아 가기를 바랐으나, 일년 반을 더 넘긴 1921년 7월에야 일본의 여권을 발부 받을 수 있었다. 8월에 호놀룰루행 여객선을 타기 위해 요코하마로 갔다가 일본 경찰에 다시 억류돼 두달간 징역살이를 해야 했다.
이런 난관을 거치며 모녀가 3년 만에 하와이로 돌아 왔으나, 그곳에서는 조국 해방에 대한 열정이 식어 있었다. 동포들을 지도해 오던 박용만 장군은 축출되고 없었으며, 대신 이승만이 차고 앉아 심각한 분열을 만들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20년대 이후 권도인은 가구회사를 발판으로 7가지 특허를 얻을 만큼 뛰어난 자신의 발명력을 발휘해 상당한 부자가 됐고, 또 독립운동 지원에도 헌신했다. 2남2녀의 자녀들도 모두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공해 초기 아메리칸 드림을 구현해 보였다. 이희경은 맏아들 결혼식을 준비하던 중 1947년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권도인은 1962년도에 생을 마쳤다. 권도인은 생전에 조국 땅을 밟아보려 일본까지 왔으나, 박용만 계열이라며 꺼리는 이승만 정권과 비자 발급에 뇌물을 요구하는 듯한 일본주재 우리 대사관 직원의 태도 등 때문에 조국 방문은 끝내 좌절됐다고 이 책은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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