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동걸칼럼-'국자 1.2호' 파동

국자(國字)란 국무원 문자(공문)를 가리키는 데 원래는 중국 말이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사용하였다. 해방 후 1945년 12월 31일에 포고한 '국자 제1호'와 '국자 제2호'가 그 것이다. 이때의 '국자'는 미군정을 축출하는 포고령이었다. 제1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군의 행정을 접수한다는 것이고, 제2호는 조선사람은 임시정부의 지시를 따르라는 포고였다.

안팎이 모두 놀랐다. 임시정부가 '국자'를 발포(發布)한 이유는 신탁통치 문제 때문이었다. 연합국을 대표한 미.영.소 3국 외상이 모스크바에 모여 해방된 조선에 대하여 새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임시정부가 정식정부를 수립할 때 까지 열국이 신탁통치한다고 합의하였다. 그것이 서울에 전해진 것이 12월 28일이었는데 그에 대한 반발로 '국자'1.2호를 발포한 것이다. 임시정부가 있는데 새로 임시정부를 수립한다고 하니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신탁통치는 식민통치의 새 유형일 뿐이므로 수용할 수 없었다.

신탁통치(국제관리)설은 1942년에 미국 정가에서 제기된 직후부터 중칭(重慶)에 있던 임시정부가 반대해 오던 것으로 해방직후에는 임시정부 뿐만 아니라 조선공산당까지 모든 정당이 반대했다. 임시정부 설립문제도 3.1운동의 정신으로 만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27년간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이제 막 귀국했는데, 그 임시정부는 없었던 것으로하고 미국과 소련이 새로 임시정부를 만든다고 하니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27년간 임시정부를 끌고 온 사람들은 더 없을 모욕감을 느끼며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국무회의를 열어 극약처방으로 '국자'1.2호를 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국자'가 발포되자 임시정부와 경합하고 있던 정치세력이 모두 놀랐다. 임시정부와 경쟁하던 우파의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물론, 좌파로서 인민공화국을 만들어 임시정부와 대립하고 있던 조선공산당(박헌영)과 인민당(여운형)도 놀라 며칠동안 입을 다물고 말을 못했다. 그런데 김구.김규식.조소앙.유림.김원봉.장건상.신익희 등의 임시정부는 목숨을 걸고 미군정에 맞섰다.

한편 그것을 '반탁 쿠데타'로 이해하던 미군도 놀란 나머지 극약처방을 구상하게 되었다. 남한 주둔군 사령관 하지장군과 그의 참모들은 임시정부 요인을 모두 체포하여 인천에 있는 일제때 포로수용소에 감금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을 세웠다. 역시 12월 31일의 일이었다. 그런데 만류 의견도 있어 하지는 김구주석을 일단 만나 보기로 하여 1946년 1월1일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서 김구.하지의 담판이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에서 합의한 것이 임시정부는 '국자'를 철회하고 미군정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자 파동'은 끝났다.

'국자 파동'은 1막의 토막극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해방 후 미군정에 대하여 독립운동의 의지를 국자 파동 이상으로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가 없다. 그리고 살아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충격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몇년 동안에 정치.경제는 미국 아니면 일본에 전에 없이 예속되어 가고 민족문화는 박살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바로 어제 20세기 마지막 광복절을 보냈다. 무엇을 광복했단 말인가? 주권행사가 새롭게 제약당한 마당에 남북 긴장도 더욱 고조되고 있으니 광복은 무슨 광복인가. 그래도 정신적 광복을 생각하여 해방 직후부터 광복절이라 일러 왔는데 민족문화까지 박살난다면 그 정신적 광복도 분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조차 분해되고 있는 20세기 마지막 광복절이라면 '국자 파동'이라도 다시 연출한 후에 21세기를 맞는 것이 어떨까?

국민대 명예교수.한국사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