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고향유정

후봉아제와 춘혁아제가 대구에 들릴 일이 있었다며 우리 공장을 찾아왔다. 항렬은 위지만(후봉아제는 할아버지뻘이지만 아제, 아제 한다), 나이는 비슷해 어릴 때 부터 친구처럼 지내온 사이여서 무척 반갑다. 포도 두 상자와 큰 봉지를 내놓는데 봉지에 금방 뜯은 조선배추가 꽉 차있다. 술 한잔이 없을 수 없다. 배추 씻어 된장 찍어 안주 삼으니 정말 고소하다.

"아지매가 좋아할 거다"하며 노모의 건강을 묻는데 고향의 정이 이에 더할 수 없다. 양념해서 밥 비벼 드는 아지매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제는 흐뭇한 모양이다.

할아버지와 춘혁아제 아버지는 아주 가깝게 지냈다. 도시로 나온 할아버지가 시골에 들르시면 떠날 때 제철이면 딴 것 다 제치고 조선배추를 싸주고 또 소중히 가져가셨다 한다. 이제 우리가 그렇게 하는가.

지난 달 동생들과 함께 고향에 갔을 때 아제와 같이 넓은 들 지나 강가로 갔다. 투망질이 한창이었다. 매운탕 생각이 절로 났다. 침만 꼴깍 삼키는데 "야들이 왔으니 고기 내놓아라"하고, 실실 웃으며"못 주겠다"버티는 정겨운 실랑이 끝에 통통한 놈들을 얻어와 끓여 먹었다. 한나절 투망질한 것을 빼앗은 것도 재미있었고, 갖은 양념하여 매운탕을 만드는 것도 재미여서 먹는 맛보다 더 좋았다.

어렸을 때 강가에 가 소꼴 먹이고 어스름해지면 들판을 지나 집으로 오며 메뚜기를 잡았었다. 지금은 농지정리가 된 들 사이로 자동차가 다니는 큰 농로가 생겼지만 그때는 고불고불 좁은 봇도랑 길이었다. 집집마다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을 바라보며 소를 몰고 가다가 흙 묻은 고무신을 물꼬에서 흘러 나오는 논물에 씻으며 한참 그 자리에 서있기도 했다. 그러면 점점 더 어둠이 깔려오고 나는 그 들판 속으로 스르르 잠겨버리는 듯한 느낌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봄날 뒷동산 무덤가에서 할미꽃을 만지작거리다가 살포시 잠이 들었을 때나 눈에 포근히 싸인 마을을 바라볼 때와 같은 평온함이었다.

겨울고기 잡고 동치미 먹자고 약속하며 아제와 헤어지는 새로 12시, 외롭지 않다고 느끼는 술 얼근한 밤의 귀가길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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