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영남기행-(40)무적 해병의 요람 포항

…영일만 아침해가 떠오를때마다/겨례위한 용맹심 솟구쳐난다/아아 해병, 영원한 해병/우리는 무적의 팔각모 사나이/…

포항시 남구 오천읍 용덕동. 해병대. "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는 투지와 강단으로 젊은 한시절 이곳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70만 예비역 해병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올해는 해병대 창군 50년이 되는 해.

지금 포항은 세계적 철강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포항제철과 연관단지 업체들이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 70년 이후에 얻어진 명성이고 그 이전 포항은 해병대로 더 유명했다.

지난 65년 해병대 복무를 계기로 아예 포항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진주 출신의 김재업(55·164기)씨는 "당시 포항의 인구는 7만명 내외였는데 그중 1만명이 해병대원이었다"며 "토·일요일 지금의 오거리~포항역등 시내 중심부에는 빡빡머리에 얼룩무늬 전투복,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의 해병대원을 빼면 사람없다고 할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특히 부대 인근 오천읍 용덕동은 2주에 한번꼴로 수요일에 치러지는 신병 입대일엔 '신병특수'가 생겨나고 아들과 애인을 품에서 떠나 보내는 여인네들의 눈물이 범벅되는 장면을 지금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포항 중심지 오거리에 있는 장병들의 복지관 '청룡회관'. 서울서, 대구서, 저 멀리 제주에서까지 부모나 애인이 면회라도 오는 날이면 장병들은 하나같이 "청룡회관 앞에서 기다려라"고 했고, 이 곳에서 만나 하룻밤을 꼬박 세워가며 가슴에 쌓인 회포를 풀었던 해병대 문화의 한 상징이기도 했다.

"전체 인구의 15% 가량이 해병대원이고 면회객에다 신병 전송객까지 합치면 포항 유동인구의 절반이 해병대 사람이었다"는 전숙자(여·66)씨. 청룡회관 옆에서 3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해온 전씨는 "상인들이 외출나왔던 해병들의 외상값을 갚아달라고 부대에 진정서를 냈다가 부대에서 외출·외박 금지 조치가 한달 정도 계속되면 이번엔 '외출·외박을 허용하라'는 진정서를 냈었다"며 당시 해병대의 포항 상권에 대한 영향력을 설명했다.

그런던 것이 포철이 설립되고 직원수가 급증하면서 해병대는 그 자리를 포철에 내주게 됐고 이를 빗대 "노랑 헬멧(포철 작업모)이 팔각모(해병 전투모)를 눌렀다"는 유행어가 나돌기도 했다.

포항 시민들 중에는 "포항에는 서울행 비행기와 새마을열차가 있어 포철은 포항에 공해만 남겼지만 해병은 월남의 청룡부대와 팀스피리트를 통해 포항 경제에 오히려 기여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52년 8월1일 1개 중대병력이 포항땅을 밟은게 포항 해병대의 시초"라고 말하는 해병대 제1사단 역사관장 이용진(53·예비역 소령)씨는 녹음기를 틀어 놓은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1943년 2차 대전에서 한창 밀리고 있던 일본군은 미 해병대의 한반도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가미가재 특공대'를 조직, 지금의 포항공항을 만들기 시작했다. 공항이 완공되기 전 전쟁은 끝났고 잠시 국방경비대 훈련기지로 이용하다 한국전이 터졌다. 이번에는 전쟁에 투입된 미해병대 제1전투 비행단이 포항공항에 주둔했고 이들의 외곽경비를 맡은 우리 해병대 1개 중대가 들어온게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해병대가 이처럼 계속된 전쟁으로 포항과 인연을 맺은지 올해로 47년. 이 사이 해병대는 포항의 구석구석에 그들의 발자취를 남겼다. 웬만한 도로건설에는 대부분 그들이 동원됐고 심지어 학교를 지어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는 문맹퇴치 사업에도 해병대가 나서야 했던게 현실이었다.

해병대의 상징이 된 홍색 명찰에 황색 글씨. 피와 정열(붉은색)로 평화(노랑색)를 수호한다는 의미다. 특히 주둔지인 포항과는 전·평시를 막론하고 생사를 같이하는게 운명이고 숙명이라는 반응이다.

해병대는 포항 주둔 이후 지난 60년 7월18일 구룡포읍 석병리로 들어온 간첩 9명 생포를 시작으로 83년 월성원전 폭파임무를 띠고 경주 양남면에 침투한 5명을 사살하는등 모두 11차례의 대간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하지만 '국민과 함께, 해병대와 함께'라는 그들의 슬로건처럼 요즘 들어서는 과외임무가 급증했다. 지난해 추석을 사흘 앞두고 포항 전역을 물바다로 만든 태풍 '예니'의 내습, 이후 불과 10여일만에 물속에 가라앉은 포항을 다시 건져 낸 주인공이 바로 해병대였다. 또 IMF사태로 부도와 실직공포가 확산될 무렵, 기업인들과 근로자들에게 "해병대 정신으로 위기를 극복해달라"며 눈물의 격려편지를 보낼만큼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그래서 해병대는 묘한 회귀본능을 자아내게 한다. 연간 1만명 이상의 예비역들이 부대를 찾고 있다. 대부분 가족들을 동행하거나 동기들이 뭉쳐서 온다.

포항 출신으로 형제를 비롯, 가족 대부분이 해병대 출신인 최영식(47·영남이공대 교수)씨는 "해병대는 젊은이에게 기백을 심어주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자산이 된다"며 "아들(고1)도 해병대를 권유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병전우회 경북연합회장 강석호(44)씨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이 서린 부대내 일월지와 이육사의 '청포도'를 낳은 도구해안, 훈련병 시절 빡빡 기어다녔던 유격훈련장 등 포항의 모든 곳이 해병대원들에게는 모천(母川)이요, 제2의 고향"이라고 했다.

포철이 포항에 들어선 것도 해병대와 무관치 않다는것이 해병대측의 분석이다. 영일만 뻘밭에서 철강왕국의 신화를 창조한 포철의 성장사 이면에는 해병대 정신이 있었다는 것. 포철 사람들이 설립본부였던 '롬멜하우스' 앞에서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모두가 오른쪽 영일만 앞바다에 빠져 죽자"고 다짐했던 '우향우 정신'이 바로'상승불굴의 해병대 정신'이며, 포철의 모태 '롬멜하우스' 건립에 해병대도 참가했다.

포항에서 태어나 살고있는 김재홍(50) 포항상의사무국장은 "포항의 시민정서가 타지에 비해 다소 거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이는 바닷가 특유의 정서에다 해병대·포철 정서가 합쳐진 것이며 이것이 오늘날 포항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고 평가했다.

방학철이면 이곳은 중·고등학생들을 비롯 직장인과 일반인들의 '극기훈련장'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해병의 상승불굴 정신을 배우려는 신청자들이 쇄도하고 있다. 무적불패 해병의 50년 전통은 2000년대에도 계속될 것이다.

글·사진 朴靖出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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