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 에세이-문학이 파르르 숨쉴때(박재열.경북대교수.시인)

대구가 아름다워졌다. 문화예술회관을 출발하여 오른쪽으로 걸어보면 성당못의 정자와 작은 다리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왼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벚나무 가로수와 영산홍과 파란 잔디와 자박자박 소리나는 보도가 이어진다. 시인 이상화가 앉아 있는 길이다. 또 국채보상공원이나 달성공원에 가보면 도심의 소음과 번잡함이 멎어 있다. 공원 안은 산사처럼 조용하고 햇살만이 고즈넉하게 내린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숲의 요정처럼 보인다. 단풍철에 불로동을 지나 봉무로를 따라 가 보면 마로니에와 느티나무의 불타는 색의 잔치에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대구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봉무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늠름한 메타세쿼이아의 도열이다. 범어로터리에서 수성못으로 가는 길도 온갖 나무가 수목원처럼 우거져 있다. 각기 때를 알아 하얀 꽃, 붉은 꽃을 피우고, 색색가지 열매를 맺고, 울긋불긋한 잎을 지운다. 만촌동의 거리도 낙엽이 서걱거리는 소리뿐이다. 양버즘나무의 커다란 잎이 양철 소리로 아스팔트를 긁는다. 그 속을 걸으면 우그러진 낙엽이 발목을 휘감으며 쏴쏴 폭포 소리를 낸다. 또 초여름에 신천 둔치에 내려가 보아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이다. 은빛으로 반사되는 물빛도 물빛이지만 담벼락 밑에서 요염한 입술을 내밀고 있는 병꽃나무가 더 없이 귀엽다. 산에만 있는 줄 알았던 이 나무가 여기에도 있다니. 이제 신천도 오폐수가 흐르던 강이 아니라 오리가 떠다니고 물새가 날아드는 강이 됐다.

나무가 주는 정신적 풍요

그뿐인가. 고산골로 올라 가보면 진한 소나무향에 취한다. 정상부분에는 완전히 잣나무의 수해(樹海)이다. 나무들의 울부짖음이고 나무들의 노래라서 희끗희끗 보이는 도시 한 자락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진다. 만나는 사람은 숲의 영기(靈氣)에 취해 더없이 엄숙하고 신령스러워 보인다. 고대 희랍인들이 이런 환경을 보았다면 숲의 요정 드라이어드가 살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나도 이제 대구에는 드라이어드가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요정은 주로 고산골이나 팔공산에 살지만 조용한 경상감영공원의 목련나무 뒤에서도 잠깐씩 모습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다. 금호강과 수성천에는 강의 요정 나이아드가 돌아온 것 같고, 앞산과 팔공산 골짜기에는 산의 요정 오레아드가 거처를 정했을 것 같다. 희랍 신화에 보면 숲의 요정 드라이어드는 목신(牧神) 판이 춤출 때 춤상대가 되어준 요정이다. '에리시크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교만에 빠져 이 드라이어드가 사는 거대한 참나무 한 그루를 무참히 베어버렸다. 그 참나무는 농업의 여신인 데메테르가 극진히 사랑하는 것이었기에 그 여신의 불같은 분노를 샀다. 데메테르는 복수하기로 하고 에리시크톤이 죽을 때까지 배고픔에 시달리게 하는 형벌을 내린다. 에리시크톤은 배고픔을 달래려고 무엇이든 아귀처럼 먹었지만 배고픔을 조금도 해소시킬 길 없었다. 그는 먹을 것을 구하는 데 전 재산을 털어 넣었고, 나중에는 딸까지 팔았지만 배고픔은 더더욱 참을 수 없었다. 그러리라. 나무를 베는 일은 하늘이 준 자연을 훼손하는 일이니 흉년과 굶주림을 불러온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나.수목 아름다움 '나무축제'벌이자

에리시크톤의 굶주림은 사실 정신적, 예술적 굶주림이라는 뜻도 된다. 나무가 없으면, 따라서 요정이 없으면, 정신적 고갈과 황폐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나무와 그 뒤의 요정을 보는 것은 상상의 눈이 떠 있음을 의미하고, 그것은 또 우리의 정신세계가 넉넉함을 의미한다. 문학이 파르르 숨쉴 때도 바로 그때이다. 요정이 사는 곳은 바로 시심이 샘솟는 곳이 아닌가. 대구의 모든 수목의 아름다움을 기리는, 또 온갖 요정과 갖가지 문학을 위한, 한바탕 제전이라도 벌이면 어떨까. 한 바탕 축제가 없으면 아름다운 주변 자연과의 친화는 멀어질지 모른다. 우리 주변과의 단절은 우리 스스로 에리시크톤의 교만에 빠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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