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몽준은 누구인가

대선출마를 선언한 정몽준(무소속) 의원은 화려한 인생항로를 밟아왔다.현대그룹이라는 '명가'의 후광에다 일찍부터 시작된 '제왕학 학습',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학벌, 경제인.체육인.정치인으로서 다양한 경험 등을 거치며 지도자의 수업을 쌓아왔다.이러한 그의 대선 입지는 여타 정치인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정치에만 매달려 따낸 것이라기 보다는, 최근까지 기업인과 축구인으로서 활동 결과가 토대가 되고 있어 일반 정치인의 궤적과는 사뭇 다르다.그는 "죽음과 마찬가지로 공직이라는 것이 신상에 덮쳐오면 도망갈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처음부터 대통령직을 겨냥, 행보를 축적해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그러나 정 의원의 의식의 심연에는 오래전부터 대통령의 꿈을 키워온 일관된 흐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작고한 부친 정주영씨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게 주변의 설명이다.14대 대선에 출마, 고배를 마셨던 정주영씨의 실패를 후대에 실현해야 한다는 부담과 의무가 늘 정 의원 주변을 배회했다고 한다.정 의원은 아버지를 검소하고 낙천적인 사람으로 기억한다. 엄하다는 일반적인 평과는 달리 외국에 나갈 때마다 엽서를 보내는 '자상한 아버지'였다는 게 정 의원의 회고. 주변에선 정주영씨도 정 의원에게 각별한 사랑을 보였다고 전한다.정주영씨는 일찌감치 '머리 좋은' 정 의원을 자신의 '정치 후계자'로 삼아 제왕학 학습을 시켜왔다. '정주영 집안'의 정-경(政-經) 양축 가운데 정치 대들보로 정의원을 지목한 것이다.정 의원은 지난 88년 37세의 나이로 '현대 왕국'인 울산 동구에 무소속 출마, 등원에 성공한 뒤 내리 4선을 지내며 중진 의원으로 입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원내에선 특정 정당에 입당하는 대신 내내 무소속의 자리를 지키며, 정쟁에 개입될 소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해 왔다.여당에 입당하라는 몇차례 권유를 뿌리치고 무소속을 고수한 것은 현대라는 기업경영이 정치권의 외풍을 받을 것을 우려한 때문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진작부터 현재 정 의원이 내세우는 '초당적' 이미지 관리를 해온 셈이다.4선의원이면서도 '참신성'이 얘기되는 것도 무소속으로서 이같이 여야의 정쟁에서 비켜서 있었던 덕분이다.정 의원은 92년말 정주영씨의 대선 실패에 이어 김영삼 정권 당시 '현대 초토화' 작업이 한창이던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축구에서 활로를 찾았다.그는 93년 대한축구협회장에 피선, 월드컵대회 유치에 본격적으로 나서며 재기를 도모했고,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과 2002년 월드컵대회 조직위원장 등을 맡아 국제적 지명도 제고와 함께 국내 여론의 중심권에 서는 데 성공했다.이에 앞서 정 후보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도미, 미국 MIT대와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딴 데 이어 곧바로 82년 현대중공업 사장으로 취임, 재계 경험을 축적했다.중앙중.고등학교 때의 정 후보는 '리더십있는 모범생'으로 동창들에 의해 기억된다. 중앙고 1학년때는 490명중 84등에 그쳤던 것이, 문과를 선택한 2, 3학년 때는160명중 5등과 9등을 하는 등 성적이 급상승했다.교사 지도사항에는 '노력형', '온순하고 성적이 우수하다'로 돼 있다. 중앙중학교에 입학하던 지난 64년 받은 지능검사(IQ)에선 '131'로 적혀 있다.중.고교때는 뼈가 다섯번이나 골절될 정도로 장난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선지 당시 별명도 '몽준이'라는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멍청이'였다고 한다.대학때는 1학년 학기말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다가 적발돼 유급당하는 바람에 1년을 더 다니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정 의원은 "대학때 정신적으로 풀려 절도있는 생활을 못했다"고 솔직히 시인하고 있다.정 의원은 스스로를 "뼈대는 경제인이고 피는 정치인이며 팔.다리는 체육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축구가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3대축이라는 인식에서다.특히 월드컵 덕분에 정 후보와 축구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월드컵4강 신화가 부각되면서 여론 지지도가 급상승, 대선 출마의 든든한 기반이 됐다는 평이다.정 의원으로선 92년 대선 실패 경험도 든든한 자산이 되고 있다. 통일국민당의 핵심으로 대선 속성을 속속들이 체험한 데다, 이른바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초원복집사건 폭로 등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체험했다.또 당시 정주영씨가 재력으로 선거운동을 벌이다 좌절을 맛본 점을 감안한듯 그는 현대 지원설에 선을 그으면서 자원봉사자 중심으로 대선운동을 하고 법정선거비용을 준수하겠다고 강조하고 있다.정 의원은 한때 FIFA 회장직을 노린 적이 있다. "FIFA 회장에 도전하든, 대통령에 도전하든 둘중 하나는 도전할 것"이라고 했다가 결국 대선쪽으로 키를 잡았다. 그로선 일생일대의 사활을 건 미증유의 도전인 셈이다.하지만 그의 대선 가도에는 험난한 역정이 예고돼 있다. 권력과 금력을 함께 쥐는 데 대한 뿌리깊은 사회적 반감과 모친의 신상, 병력(病歷)을 비롯한 주변문제에 대한 검증, 정치력 및 자질 한계론 등이 그것이다.이에 대해 측근들은 "그만의 노하우가 있다"며 극복을 자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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