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전종필)
저기 소년이 오는군요. 언제나 어깨가 축 처진 힘없는 모습이죠. 소년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소년은 나에게 다가와 쉴 것입니다.
그리곤 잠시 있다 다시 떠나겠죠.
소년이 다가와서 앉는군요. 소년은 언덕 위에 있는 나를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는 듯 했습니다.
아니면 그냥 습관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 나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아. 그루터기, 너도 마찬가지야. 너는 아버지에게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으면서 나에겐 아무 것도 주지 않잖아?"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이니까요. 나는 잎도 가지도 열매도 없는 그루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은 소년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내 곁을 떠날 것 같습니다.
"윽-".
발가락이 아파 오는군요. 벌써 오래 전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거무스레하게 변한 발가락이 점점 더 넓게 퍼지면서 썩어들어 가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얼마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큰 폭풍우가 지나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생활의 터전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전해져 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썩은 내 발보다 더 아프게 와 닿습니다.
소년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군요. 아마 떠나 버린 모양입니다.
그러나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돈이 아주 많은 사람도 있고, 허리 구부정한 노인도 있고, 티 없이 맑은 아이들도 있고, 몸이 불편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나에게 와서 쉬었다 갑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언제나 나를 내어 줍니다.
사람들은 잠시 앉았다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 저기 소년이 오네요. 나를 잊어버린 줄 알았더니 그렇지는 않은가 봅니다.
소년의 모습이 뭔가 달라 보입니다.
남루한 옷차림에 군데군데 흙이 묻은 옷을 입었습니다.
전보다 훨씬 더 힘이 빠진 것 같군요. 터벅터벅 걷는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모든 게 끝났어. 폭우에 모든 것이 다 떠내려 가버렸어. 전에도 그랬지만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아.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어쩌면 진짜 여기를 떠 나야 될 지도……".
소년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그저 자리만 내 주었습니다.
발끝이 아려옵니다.
시간이 지났습니다.
또 한 사람이 오고 있군요. 지금까지 보아오던 사람들의 생김새와는 좀 다릅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키도 좀 작고 머리 모양도 틀리는 것을 보니 외국 사람인 모양입니다.
힘없이 걸어오더니 털썩 주저앉습니다.
"아, 희망을 갖고 이곳에 왔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구나. 아무리 노력해도 돈이 모이지 않아. 고국에 있는 부모님과 동생들이 내가 돈을 벌어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아. 나쁜 사람들! 내가 외국인이라고 돈도 절반 밖에 주지 않고 그나마 그 돈마저 제때 주지 않다니……. 아, 이곳 사람들이 미워지 는구나. 이러다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분노와 절망이 섞인 말을 내뱉고 쓸쓸히 돌아가는 외국인을 보며 안타까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썩어버린 발은 더더욱 아파 옵니다.
떠나버린 소년과 외국인을 생각하며 며칠을 지내는 동안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단정한 옷차림에 품위가 느껴지는 기품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 역시 나에게 와서 잠시 쉴 것입니다.
앉는 모습도 품위가 있군요.
"하하하, 됐어. 이렇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어. 남들이 뭐라고 하든 관계없어. 나만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한 일도 나는 할 수 있어. 흥, 외국인 놈들. 너희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쩔 수 없어. 너희들이 있는 것 자체가 불법이니까 내가 어떻게 하더라도 너희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걸. 하하하".
말을 마친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가려다 말고 나를 한번 돌아봤습니다.
"어, 이 그루터기 썩었네? 에이, 재수 없어. 하필 썩은 그루터기에 앉다니".
그러더니 내 아픈 발을 확 차고는 옷을 툴툴 털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픈 발이 더욱 아려 오는군요. 겉모습을 보고 잘못 판단한 일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자리를 내어 주기도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희망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나는 언제나 행복합니다.
비록 그루터기 밖에 남지 않은 몸이지만 누구에게나 자리를 내어 줄 수 있으니까요.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은 이제 잊어버리려 합니다.
발이 아려 오네요. 점점 견디기 힘들어 집니다.
처음 발끝에서 시작된 통증이 이제 많이 번져서 어디까지가 성한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발을 치료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닌데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힘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입니다.
마을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낯선 사람들도 많이 보이는 것을 보니 다른 곳에서 도와주러 온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그렇게 많던 쓰레기들이 한 곳으로 정리되고 흙더미밖에 보이지 않던 도로도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프던 발이 시원해지는 듯 합니다.
한 마리 하얀 토끼가 뛰어 오고 있군요. 백설같이 하얀 몸에 구슬같이 붉은 눈, 커다란 귀를 쫑긋거리며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습니다.
흰토끼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입을 오물거리며 이를 내 몸에 갈고 있습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썩어버린 몸이지만 자리를 내어 주는 일 외에 아직까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더 없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흰토끼는 이를 다 갈고는 다시 산으로 돌아갑니다.
아주 만족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저기 한 소녀가 오고 있군요. 먼 길을 온 듯 지친 모습입니다.
그런데 눈을 보니 생기가 있군요. 맑고 투명한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이듯 깊은 눈을 가졌습니다.
진실로 아름다운 눈입니다.
가까이서 보니 몸 전체에서 뭔가 다른 점이 느껴집니다.
포근함이랄까, 친숙함이랄까 알 수 없군요. 어찌 보면 천사처럼 고결하기도 하고 어찌 보면 너무나 평범하여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마치 공기 같은 느낌이랄까?
소녀의 몸에서 뭔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이것은 향기입니다.
몸에서 저절로 배어나는 향기입니다.
향기를 지닌 사람은 많지 않은데 이 소녀에게서 향기가 배어 나옵니다.
기분 좋은 향기를 풍기며 소녀가 나에게 다가와서 앉는군요.
"저 마을은 물난리를 겪었구나. 저런 마을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욱 많겠구나. 어서 가봐야겠다".
잠시 쉬던 소녀는 그 말을 남기고 종종걸음으로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소녀의 말을 들으니 향기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습니다.
그 동안 다른 사람에게서 듣던 말과는 많이 다른 말입니다.
마을을 내려다본지도 며칠이 지났습니다.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그 소녀가 눈에 뜨입니다.
마을 길 청소하는 곳에서도, 빨래하는 곳에서도,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곳에서도, 농작물이 있는 곳에서도 어디서나 소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도 많이 하는군요. 소녀가 있던 곳에서는 항상 웃음이 감돌고 있는 것도 참 특별한 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동안은 찾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폭풍우로 무너진 것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느라 그런가 봅니다.
그런 동안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픕니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 소리, 새들의 노래 소리,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주위 나무들의 모습만 하염없이 듣고 바라볼 뿐입니다.
문득 소년이 보고 싶군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날씨는 점점 차가워지는데 아직까지도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들이 집이나 물건뿐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소중한 무언가는 항상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마을은 이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군요. 아, 저기 정말 오랜만에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군요. 외국인입니다.
나에게 와서 절망과 분노 섞인 말을 내뱉던 그 외국인입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아. 그 동안 너무 절망과 분노, 미움으로만 산 것 같구나.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어. 내 자리를 지켜야 했어. 나에게 깨달음을 준 그 소녀. 이름이 '슬'이라고 했지. 나보고 왜 여기 있냐고 했지. 소중한 사람들을 두고 왜 여기서 미움과 분노로 사냐고 했지. 그래,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어. 더 소중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야. 그 소녀 '슬'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구나.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라는 말이. 이제 나도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할 일을 해야겠어. 그 소녀 '슬'처럼……".
발걸음을 돌리며 가는 모습이 전과는 다르게 무척 가벼워 보입니다.
눈에서도 미움과 절망 대신에 희망이 보이는군요. 내 아픈 발에도 생기가 도는 것 같습니다.
또 한사람이 나를 찾아오고 있군요. 기품 있어 보이는 발걸음에 단정한 옷차림을 한, 돈만 벌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그 사람이군요. 썩었다고 나를 걷어차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내가 번 것이 돈이 아니었다고? 다른 사람의 절망과 미움과 분노를 번 것이라고? 내 저승의 곳간에는 돈 대신 절망과 미움과 분노만이 가득 차 있을 것이라고? 흥, 저승이 무슨 소용이야. 지금이 중요하지. 아, 아니야. 그런데 왜 그동안 계속 가슴 한 쪽이 텅 빈 것 같았을까? 그 소녀 '슬'은 내가 보기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어. 그런데 왜 그 소녀 '슬'의 주위에는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걸까? 나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보다 훨씬 많을 텐데 왜 하지 않느냐고 물었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심한 갈등을 하며 돌아가는 그 사람을 보니 앞으로는 무언가 달라질 것 같군요. 오늘은 행복한 날입니다.
내 아픈 몸이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상한 날이군요. 그동안 오지 않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옵니다.
그동안 제일 보고싶던 소년이 저기 오는군요. 기분 좋은 날, 보고 싶던 소년을 보니 더더욱 기분이 좋습니다.
"슬, 그 소녀가 왜 날 보자고 했을까?"
소년의 말이 끝나고 잠시 후 한 소녀가 보입니다.
아, 그 소녀군요. 온 몸에서 향기가 배어나던 그 소녀입니다.
그 소녀의 이름이 '슬'이었군요.
"넌 왜 아무 일도 하지 않니?"
소녀가 대뜸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까.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넌 왜 그렇게 살지? 너에게 남는 것도 없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소녀의 너무도 간단한 말에 소년은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합니다.
"비, 네 이름이 '비'라고 들었어. 넌 지금부터 나와 해야 할 일이 있어".
"그게 뭔데? "
"네가 지금 앉아 있는 그 그루터기를 치료하는 일이야. 항상 여기에 와서 쉬었다면서 썩어 가는 것을 보고 그냥 두었니?"
소녀의 말에 소년이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제서야 내 상처를 발견한 듯 놀람의 빛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렇구나. 썩어가고 있었구나".
"그게 '비' 네가 맨 처음 해야할 일이야".
"슬, ……".
슬과 비는 손을 맞잡았습니다.
슬과 비의 눈이 많은 말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 날 이후, 슬과 비는 매일 찾아왔습니다.
썩은 것은 도려내기도 하고 감싸주기도 하였습니다.
약도 뿌려 주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기울여 나를 보살펴 주었습니다.
다음 해 곡우(봄비)가 소담스럽게 내리던 날 내 몸 깊은 곳에서는 작지만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뿌리에서 물과 양분을 빨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싹이 움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곧 새순이 돋아날 것입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잎이 돋아날 것이고 가지도 생길 것이고 열매도 생길 것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