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투수 김시진 큰 경기 약해도 당대 최고 에이스

투수 출신인 김영덕 감독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선수는 김시진이다.

86년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2대0으로 이기자 김영덕 감독은 8회 마운드에 김시진을 올렸으나 쓰라린 역전패를 맛보며 나란히 패장과 패전투수가 됐다.

김 감독과 김시진의 운명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경기였다.

삼성 마운드를 화려하게 이끌었던 김시진은 한국시리즈에선 번번이 좌절을 맛 봐 삼성의 80년대를 웅변하고 있다.

대구상고 시절 경남고의 최동원, 군산상고의 김용남과 함께 초고교급 투수의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던 김시진은 한양대와 경리단(육군 팀)을 거쳐 83년 프로에 데뷔했다.

한양대 졸업후 당시 실업팀 포항제철에 입단하려 했으나 팔꿈치 부상으로 부진하자 실업팀이 외면, 경리단에서 군인 선수로 복무를 마친 후 프로에 발을 들여놓았다.

실업팀의 냉대로 서러움을 겪었던 그는 83년 시즌 17승12패의 성적을 올리며 화려하게 출발했다.

84년에는 19승11패, 85년 25승5패, 86년 16승6패, 87년 23승6패로 승승장구했다.

데뷔 5년만에 총 186경기에 출전, 프로 최초로 100승의 금자탑을 세웠다.

김시진은 역동적인 최동원(롯데)과 달리 깔끔한 투구 스타일로 신사적인 이미지를 풍겼다.

시속 145㎞의 빠른 볼을 바탕으로 슬라이더는 당시 국내 최고의 구위를 자랑했다.

그러나 타자들을 압도한다는 인상은 주지 못했다.

최동원이나 선동열(해태)이 타자를 압도하는 스타일로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지워준 데 비해 김시진은 까다로운 타자를 만나면 정면 승부를 기피, 유약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100승을 거두는 동안 589개의 볼넷을 양산, '옥에 티'로 남았다.

그러나 김시진은 빛나는 투수임에는 분명했다.

김시진에게는 환한 빛 만큼 그늘도 깊었다.

84년 한국시리즈에서 2패를 당한 그는 86년 한국시리즈에서 에이스라는 이름에 부끄럽게 3패를 기록했다.

그의 불행은 끝나지 않아 87년 한국시리즈에서도 2패를 추가해야만 했다.

큰 경기에 약했던 김영덕 감독처럼 그도 심장이 약해서일까, 운명의 신은 그에게 절반의 영광만 허락했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시리즈 최다패전 투수로 남아있다.

88년 11승을 거둔 뒤 그는 롯데의 최동원과 맞트레이드되고 말았다.

당시의 트레이드는 선수에게 크나큰 좌절감을 안겨줄 정도로 충격적인 일. 삼성 시절 혹사당한 경향이 있었던 그는 89년 롯데에서 4승9패를 기록하는 등 하향세를 기록했다.

결국 89년부터 92년까지 세 시즌 동안 그는 13승을 추가하는 데 그치며 영욕이 엇갈렸던 유니폼을 벗었다.

통산 다승 6위(124승)의 성적이었다.

93년 시즌부터 태평양 코치, 현대 코치로 지도자 생활에 접어든 그는 현대를 '투수 왕국'으로 만들었다.

김지석기자 jise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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