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지하철 참사-남은 자가 할일

2001년 9월11일 발생한 뉴욕 세계무역센터 비행기 테러 대처 과정은 국가적 재난에 대한 미국의 대응방식을 잘 보여줬다.

테러 발생 직후 멀리 떨어져 있는 알래스카 석유 송유관에까지 비상 경계조치가 내려졌고 동시에 마이애미 우주선 발사기지 종사자들이 긴급 소개됐다.

연방항공청은 미국내 모든 민간항공기의 이착륙을 금지시켰다.

모두가 순식간에 진행된 조치였다.

미국 중부 덴버에서 체험했던 한 상황도 우리와는 전혀 달랐다.

우리와 달리 제일 갓 차로로 달리는 응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그 차로의 자동차들은 도로 옆 빈터로 서슴없이 올라가 멈춰섰다.

운전자는 "응급차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길을 비켜줘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처벌받는다"고 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응급차들이라도 거의 꼼짝없이 정체에 걸리고 만다.

반대편 차로로 넘어 달려 보기도 하지만 네거리를 만나면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멈추고 만다.

응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경광등이 번쩍거려도 일반 자동차들은 태연히 갈 길을 그냥 가기때문이다.

이런 차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우리에게는 재난에 대한 총력 대응 마인드나 체제가 갖춰져 있지 않기때문"이라고 했다.

화재나 재난의 징후가 발견되면 그것의 실제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한 최악의 상황을 가상해 최대한의 대응을 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번 대구지하철 참사의 경우에 1080호 전동차가 중앙로역 화재 사실을 안 것은 두 역이나 떨어진 칠성역에 있을 때였다.

만약 최소한의 위험 징후에도 최대한의 대응을 하도록 하는 체제가 대구지하철에도 갖춰져 있었더라면 1080호 전동차는 아예 칠성역에서 멈춰 서버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15분이나 되는 대응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기관사나 사령실은 대처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별일 아닐 것"이라는 안일한 마음 가짐도 작용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들을 움직일 시스템이 총력 대응 방식으로 체계잡혀 있지 않은 것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안전생활실천 시민연합 이규원 실장은 "작년 월드컵대회 때 미국선수단 안전 경비에 경찰특공대와 헬리콥터.장갑차까지 동원됐던 방식의 총력대응 체제가 평상시에도 가동된다면 대구 대참사 때도 희생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마인드 자체가 총력 대응 중심으로 구축돼 있지 못하다 보니 현장 장치들도 허술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국립방재연구소 백민호 연구원은 "우리나라의 비상사태 대비 시스템 자체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 아니다"며 "119 구급대원은 현장 상황을 모르는 채 출동해야 하고 경찰 지휘라인은 너무도 복잡해 사고 발생 초기의 즉각적인 지원이 어렵게 돼 있다"고 했다.

대구경찰청 김만일 경비경호계 주임은 "경찰에도 화재.재난 등 비상사태 대응 체계가 구축돼 있지만 파출소 직원, 파출소장, 경찰서, 경찰청 순으로 보고체계가 복잡하고 지휘체계 역시 참모.상황.지휘라인이 따로 돼 있어 현장 상황에 맞는 신속한 대응이 어려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종합방재 시스템을 구축한 서울시 방재센터 박만영 상황 총괄담당은 "출동하는 119 구조대원에게는 현장 위치.지리정보.도시가스.통신시설.의료정보 등을 곧바로 제공한다"며 "대구소방본부가 이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더라면 구조라도 훨씬 잘 이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하철공사 감사팀 정연두씨는 "한 전동차에 사고가 날 경우 운행 중인 다른 전동차가 모두 정지토록 하는 시스템이라도 갖춰져 있었더라면 1080호 전동차의 진입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1080호 기관사에서 또 두드러진 하나의 특징은 전동차가 중앙로역에 도착하고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본인조차도 그 위급한 화재 현장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점이었다.

교신 내용을 보면 사고 당일 오전 9시57분부터 10시2분 사이 5분 동안이나 기관사와 사령실은 허둥대기만 했다.

가장 귀중한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 버렸다.

왜 그랬을까? 대구지하철 도병찬 기관사는 "기관사는 종합사령실의 지시를 따르도록 돼 있기때문"이라고 했다.

현장 요원들에게 선택의 재량권이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여건에서는 어느 기관사였더라도 쉽게 독자적 결정을 내려 승객을 대피시키고 자신도 자리를 피하기 쉽잖았을 것이다.

사령실의 지시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선택해 대처했다가 나중에 정말로 별것 아닌데 과잉 대응했다는 판정이라도 내려지게 되면 문책이 엄중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 기관사는 "긴급사고 발생 때 지하철 기관사들에게 보다 폭넓은 사고 대처 재량권이 주어져야 그나마 실효성 있는 대처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현재 방식의 조직 운용을 "민간까지 관료화된 결과"라고 진단하고, 재난에 대한 총력 대응체제 부재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영남대 행정학과 우동기 교수(도시방재 전공)는 "지하철이나 철도 등의 운영 지휘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무조건 굴려야 한다'는 경직된 태도를 버려야 현장 요원들의 대처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서 "관료화된 사회조직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했다.

최창희기자 cch@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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