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변호사 출신 대통령 답게

고 박정희 대통령이 영남대학교를 설립토록 했을 무렵 열차를 타고 경산 부근을 지나가다 개교상황이 궁금해 비서진에게 물었다.

"영대가 여기 경산에 있지?" 비서진이 벌판쪽을 가리키며 "예, 저쪽입니다"고 대답하자 창밖을 내다본 박 대통령이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던졌다.

"어디있어 잘 안보이네?"

그 일이 있은 뒤 즉시 영대 캠퍼스 한가운데에 22층 빌딩(지금의 도서관)이 초고속으로 우뚝 솟아났다.

이 일화는 고위층의 무심히 던지는 말 한마디까지도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고 아래위 앞뒤를 살펴가며 진중히 해야하는가를 보여주는 일화다.

최고통치자의 말 한마디는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번져나가거나 합리성을 가리지 않고 무언가를 저지르게 하는 법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여러가지 긍정적인 이미지 중에서도 조금은 아슬아슬하거나 불안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다면 앞뒤 좌우를 가리지 않는 듯한 그의 '말'이다.

그러한 그의 어투나 걸러지지 않은 어법은 때로 단순 명쾌하면서도 투박함이 갖는 진솔함이 있어서 좋다.

또한 그러한 이미지는 오히려 점잖만 빼는 보수적 권위나 제왕적 위엄으로 치장된 언어보다 오히려 매력적일 수도 있다.

실제로 보수층에겐 다소 경망해 보이거나 '그래도 나라 어른의 체통이 있는데...'라는 아쉬움을 줄지 모르지만 젊은 세대에겐 나름대로의 신선함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래서 이왕이면 그의 다변(多辯)을 약점이 아닌 인간적인 매력쯤으로 여겨주고 시원시원한 말투 그대로 좋은 일 합당한 일만 시원시원하게 이뤄내 달라는 기대와 함께 가끔씩 튀어나오는 거칠고 불안스런 말들을 아직은 애정어린 신뢰로 받아주고 있다.

그러나 어제 한 말과 오늘 아침 말이 다른 말, 오늘 한 말이 내일이면 뒤바뀌는 말까지 매력있는 말이라고 말해줄 수는 없다.

지도자는 자신의 말 한마디의 의미 자체를 살필줄 아는 능력을 뛰어 넘어 그 말이 가져올 여파와 반작용까지 예견할줄 아는 예지력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장관이나 국장 과장이 해야할 사안까지 직접 나서서 이말저말 무 자르듯 결론을 내버리거나 암시적인 속내를 비쳐버리면 국정시스템 자체가 깨진다.

독일속담에 "입을 열려면 침묵보다 뛰어난 것을 말하라. 그렇지 못하면 가만히 침묵하는 편이 낫다"는 말이 있다.

한미관계나 북핵 같은 외교적으로 지극히 민감한 문제가 걸린 시기의 외교적 발언은 그야말로 '뛰어난 것'을 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우방과 외교실무팀의 전략구상에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의 대북인사 접촉 의혹설에 대한 보좌관의 말과 대통령의 말이 하룻밤사이에 서로 정반대로 뒤바뀐 것이나 신임 장관의 이중국적 문제에서 기준이 바뀌는 것 등이 그의 말에 대한 불안과 불신의 비판을 자초하고 있는 예다.

어느 외국경제인이 한국에 대한 외국자본 투자가 위축되는 것이 북핵문제보다는 한국 정치 지도자들의 말 바꾸기가 더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는 보도는 따가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어제 낮 젊은 검사들을 모아놓고 대화와 토론의 말씨름을 한 시도는 일단 신선했다.

정치검찰이 된 원인 시비는 검사측이, 서열관행 파괴는 대통령 생각이 맞는것 같고 감정적 대응과 예의문제가 다소 있긴했지만 그러한 토론 마당은 참여정부 스타일에는 잘 어울렸다.

그런데 그 의미있는 대화자리가 '말' 탓에 분위기가 꼬여 버렸다.

'검찰 상층부는 신뢰 하지 않는다'는 말 한마디에 잔여 임기보장을 해줬던 검찰총장이 정부가 검찰을 통제 하려 든다며 사표를 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말의 결과(사퇴)를 미리 예견하고 한 말이라면 임기보장 한다던 말을 말바꾼 것이 되고 검찰 개혁 강조 하다보니 나온 말이었다면 지도자가 말의 여파를 내다보는 예지가 모자랐다는 얘기가 된다.

검찰 상층부를 신뢰 못한다고 하느니 차라리 사표 내시오 하는게 더 솔직담백한 말이 아니었을까.

권력에 대한 눈치보기는 권력자의 말이 원칙없이 왔다갔다 할때 생겨난다.

아무튼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 변호사 출신답게 부디 지금부터라도 매력있는 말투로 침묵보다 더 뛰어난 말만 가려가며 하는 진중한 지도자로 존경 받았으면 좋겠다.

말투 꼬투리잡기가 아니라 그의 말 한마디는 국정과 너무도 밀접해 있기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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