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포 앞바다에 고래가 뛰어 노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지난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국내 고래잡이 명포수(名砲手)로 이름을 날렸던 김해진(76.울산시 남구 장생포동)씨. 최근 울산시가 오는 2005년 제57차 IMC(국제포경위원회)총회 유치를 위해 총력전을 펼치는 것을 보는 김씨의 마음은 남다르다.
과거 장생포는 한국의 대표적인 고래잡이 전진기지였다.
김씨는 장생포 역사의 산 증인일 뿐 아니라 국내 포경업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인물.
해방 전이던 1944년, 17살에 일본 국립해원학교(國立海員學校) 항해과 3기생으로 졸업한 그는 2차대전중 일본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주)일본우송(郵送)에 2등 갑판원이 돼 배를 타기 시작했다.
징집을 피하기 위해 현재 일본수산의 전신격인 일본해양어업통제(주)에 취업했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해방이 되자 일본해양어업통제측은 귀국한 한국인 350명의 퇴직금과 임금을 주지 않았다.
지금은 작고한 선원대표 김옥찬씨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담판을 지었고, 밀린 돈 대신에 포경선 2척을 받아왔다.
그때부터 김씨는 70㎜ 고래잡이 포(砲)를 잡기 시작했고, 고래잡이와의 질긴 인연이 맺어지게 됐다.
국내 최초의 수산관련 주식회사인 (주)조선포경이 장생포에 설립됐고, 당시 포경업이 활황을 맞으며 울산지역 경제를 장생포에서 주도하다시피 했다.
57t 목선에서 포수생활을 시작한 뒤 100t급 철선까지 바꿔타면서 김씨는 장생포 앞 바다와 서해 흑산도, 어청도, 대청도까지 누비고 다녔다.
그의 손에 잡힌 고래만 해도 수천마리. 재래식 포로 고래잡는 비법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장생포를 중심으로 포경업이 발달한 이유는 먹이 때문이죠. 우리나라 근해 중 큰 강 즉 형산강, 낙동강, 태화강과 해수가 교차하는 지역에 고래가 좋아하는 먹이인 새우가 모여 있었습니다.
고래떼를 발견하면 고래가 싫어하는 소음을 내는 경탐기를 작동합니다.
이 소리를 들으면 고래는 바다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수면 위에 머무르죠. 이 때 고래의 급소인 가슴을 겨냥해 포를 발사합니다".
비슷한 연배의 뱃사람으로는 보기 드물게 해양관련 전문교육까지 받은 김씨. 푸른 파도 위에서 벌이던 고래와의 한판 승부는 지금도 잊혀질 수 없는 아련한 추억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정부의 고래포획 금지 이후 포를 놓은지도 어언 18년이 됐다.
팔십 나이를 바라보며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마냥 어렴풋이 기억될 노포수(老砲手). 하지만 아직도 그에게는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봄.가을로 수산진흥원에서 실시하는 연근해 고래생태 탐사때 동행해 실전 전문가로 톡톡히 한 몫을 하기 때문. 비록 그의 손에 많은 고래들이 죽었지만 고래를 아끼는 그의 마음은 남다르다.
때문에 노포수가 남긴 한마디는 의미가 깊다.
"당시 우리나라 근해에 고래가 많이 서식했던 것은 수질오염이 없었기 때문이죠. 지금은 고래가 살 수 없는 바다가 돼 버렸어요. 고래를 잡을 수 없어 안타까운게 아니라 고래를 볼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울산.윤종현기자 yjh0931@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