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현장2003-결혼식 신풍속도

배현의(29·여·대구시 동구 입석동)씨는 지난달 특별한 결혼식을 경험했다.

대학 캠퍼스 잔디밭에서 열린 결혼식엔 신랑신부 입장도, 화려한 웨딩드레스·턱시도도 없었다고 했다.

전통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신랑신부가 일일이 돌아다니며 하객들에게 직접 인사를 했다.

주례의 덕담에 이어 반지 교환이 끝나자 바로 흥겨운 사물놀이가 이어졌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즐겁게 음식을 나눴다.

하객들도 정장이 아닌 편한 복장으로 참석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신랑신부와 하객 모두가 '함께 즐기는' 결혼식이었다고 했다.

'결혼식은 엄숙하고 경건해야 한다'는 관념이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약해지면서 결혼식을 '실속'있고 '재미'있는 깜짝 이벤트와 축제의 장으로 만드는 예비부부가 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혼식 준비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김동식(28·달서구 용산동)씨는 e메일 청첩장을 받고 하루종일 웃고 다녔다고 했다.

결혼을 앞둔 친구가 보낸 e메일 청첩장 내용 때문이다.

예비부부의 친구가 직접 그린 만화 청첩장엔 신랑과 신부의 만남에서부터 첫키스, 시련, 청혼, 결혼까지 재미있는 연애시절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있는 'e메일 청첩장'은 제작비용이 적고 예비부부의 독특한 사연까지 담을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청첩장에 연결된 인터넷 게시판에 축하 메시지를 직접 남길 수도 있다.

또 최근 결혼식장에서만 받아볼 수 있는 신문도 생겼다.

신랑신부의 '결혼신문'이다.

결혼신문엔 신랑이 장모에게, 신부가 시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글과 주변 친구들의 축하글, 예쁜 사진 등 결혼과 관련된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어 보는 이들을 유쾌하게 한다.

강공주(29·여·달성군 화원읍)·임승철(33)씨는 '결혼신문'을 발간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했다.

집안 어른들은 "다른 결혼식에선 볼 수 없는 거라 신선하다"면서 자랑거리로 여겼을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피로연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배수호(30·북구 복현2동), 김보은(28·여)씨는 지난해 결혼식 피로연에서 후배들이 과커플이었던 자신들의 캠퍼스 생활을 담은 영상을 제작, 선보여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피로연장 주변 곳곳엔 영화 포스터에 자신들의 얼굴을 넣은 포스터를 붙여 축제분위기를 더했다고 했다.

배씨는 "후배들이 자신들의 결혼을 위해 뭔가를 준비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쓴 줄은 몰랐다"며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했다.

결혼식장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연예인들이 결혼식장에서 외치던 신랑의 '만세삼창'은 이제 흔한 풍경이 됐고 신부들도 "땡잡았다"를 세 번 외치는 경우도 적잖다.

웨딩숍 '결혼을 만드는사람들' 김은희 원장은 "요즘엔 결혼식장에서의 불필요한 절차와 형식적인 치레는 사라지고 부모님께 큰절을 하고 신랑이 친구에게 부케를 던지기도 하는 등 재미있는 광경이 많이 벌어진다"고 전했다.

남녀 평등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신랑신부가 결혼식장에 '동시입장'하는 광경도 종종 눈에 띈다.

지난해 결혼식을 한 배명은(30·여·달서구 용산동)씨는 "동시입장을 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아버지가 섭섭해했지만 곧 이해해주셨고, 결혼식장 분위기도 훨씬 좋았다"고 말했다.

이날 하객으로 참석한 최희정(31·여·북구 읍내동)씨는 신부 아버지가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해주는 것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고 했다.

최씨는 "여자가 결혼을 하면 시집식구가 된다는 생각이 점점 약해지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신랑신부 모두가 양가 부모에게 잘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용일(32·경북 포항시 창포동)씨도 신부 이미정(30)씨와 동시 입장을 했다.

신랑신부 입장 전에 주변사람들의 축하메시지를 담은 영상을 틀고 두 사람이 동시에 입장했다.

동시입장은 "둘이 함께 앞날을 열어가자"는 평등의 의미. 주례사 후 선배와 후배, 친지들이 차례로 덕담을 하는 순서를 가졌다.

신랑신부는 '결혼 다짐글'을 낭독하고 함께 노래를 불러 결혼식장을 찡한 감동의 자리로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결혼식 분위기를 아직 생소해하는 기성세대나 일부 젊은이들이 많다.

최근 결혼식에서 주례를 선 김홍주 덕원중학교장은 "요즘 결혼식에선 주례사보다 만세삼창이나 포옹 등 재밌는 이벤트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신랑신부가 주인공이 돼 좋은 분위기에서 결혼식을 즐기는 것도 좋고 이해가 되긴 하지만 많은 어르신들이 참석하고 인륜지대사인 결혼식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된다"고 말했다.

올 가을 결혼식을 올릴 예정인 임성혁(32·경북 경산시 신천동)씨도 주례나 사회를 여성에게 맡기는 등의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긴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고 했다.

"다들 새롭고 신랑신부가 주체가 될 수 있는 결혼을 계획하지만 부모님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실행하기는 힘들 것 같다"며 "현재 방식의 결혼식 관행이 계속되는 한 큰 변화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결혼식 문화의 변화에 따라 각광받는 업체들도 생겨났다.

지난해 말부터 부쩍 늘어나고 있는 '웨딩컨설팅'업체는 가전·가구 구입은 물론 웨딩샵과 예식장, 신혼여행지 등 결혼 준비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문적으로 관리해준다.

시간이 촉박하거나 예비부부 모두가 직장인인 경우가 많이 찾는다는 '웨딩컨설팅'은 매니저가 모든 일정을 관리해준다.

하객을 대여해주는 서비스도 인기다.

친구들이 직장관계로 전국 각지로 흩어지는 등의 갖가지 이유로 친구들의 결혼식 참여도가 낮아지면서 생겨난 것. 친구는 물론 부모, 친척 역할까지 대신해 준다고 했다.

한 웨딩컨설팅 업체 이용기 실장은 "하객대여서비스에 대한 문의가 끊이질 않는다"고 했다.

친구 역할을 맡은 사람의 경우엔 예식 시작 30분 전에 도착해 '친구노릇'까지 해주고 '부모 대여'는 예식 한 시간 전부터 하객들을 맞아주는 일부터 시작한다.

신청자는 사진 등을 통해 친구나 부모 역할을 대신 해줄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

하객대여 아르바이트를 10번 정도 했다는 박정현(26·여·북구 고성동)씨는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신부가 너무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면 돈 생각은 사라지고 보람을 느끼게 된다"며 "막상 결혼을 앞두면 결혼식에 와줄 친구가 몇 명쯤 될지, 배우자 친구에 비해 숫자가 적지나 않을지 하는 스트레스가 큰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박씨의 경우 결혼식 시작 30분쯤 전에 신부 대기실에 가서 "어머, 오랜만이다"라고 시작해 진짜 친구처럼 말을 건네고 사진도 찍는다.

물론 신랑에게는 비밀.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념사진을 찍고 신혼여행을 떠날 때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는 것이 마지막 임무. 보통 2시간 남짓 '친구 역할'을 해주면 결혼식 장소에 따라 3만~5만원 정도의 일당을 받는다고 했다.

전통문화에 최근의 혼례 문화의 변화를 반영한 방식도 있다.

최근 젊은이들에게 인기있는 궁중식 혼례가 그것. 정욱경(28·여·남구 봉덕동)씨는 최근 조선시대 왕실에서 행했던 왕과 왕비의 혼례를 현대적 의미에 맞게 간소화시킨 궁중식 혼례에 참석했었다고 했다.

80년대 유행하던 전통혼례와 달리 장엄하고 화려한 복장에다 양가 부모도 직접 혼례에 참여했다는 것. 정씨는 "우리 고유의 방식인데다 신랑신부가 직접 선언서를 낭독하는 등 결혼식의 주인이란 느낌이 들어 좋았다"고 했다.

이러한 결혼식 문화의 변화에 대해 경북대 사회학과 노진철 교수는 "현재 우리 예식 문화는 서양 결혼식의 형식만 빌려와 독특하게 형성된 것으로, 서양처럼 종교적 행사가 아니므로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하다"면서 "최근 결혼 행사가 부모 중심에서 부부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은 사회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최세정기자 beac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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