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석공예 명장 윤만걸씨-신라 숨결 되살리는 '아사달'

경주시 도지동, 시내에서 불국사로 향하는 도로변에 위치한 그의 작업장은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틋한 사랑을 담은 영지(影池)가 인근에 있고, 삼국통일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통일전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신라천년 역사의 한가운데 있는 넓은 공간은 장소가 차지하는 의미부터 여느 작업장과 다르다.

이곳에서 이 시대의 아사달, 윤만걸(50)명장이 천년의 미소와 숨결을 되살리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석공예 명장 윤만걸씨. 역사를 이뤄낸 최고의 솜씨, 그러나 느릿한 걸음과 어눌한 말주변은 천년전 신라장인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제대로 된 작품을 위해 수만번의 정과 망치질이 필요하며, 그래야만 작품에 혼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의 손길에 따라 생명이 없는 돌에서 거짓말처럼 천년역사가 조명되고 신라인의 미소가 되살아난다.

세월을 이기지 못해 파손되고 유실된 석조유물이 그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다.

특히 석조유물전시장으로 불릴 만큼 수 많은 돌탑과 불상이 산재한 경주 남산은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

남산정비사업으로 시작된 용장사지 삼층석탑의 해체복원과 국사골 삼층석탑 복원, 늠비봉 층석탑 복원 등을 주도, 원형에 가깝게 재현해 냈다.

또 지난 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행사 때는 실물크기 5분의 1로 축소한 포석정과 김유신 장군묘에 있는 12지신상을 완벽히 재현해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다.

지난 97년 삼십여년간 문화계의 숙제로 남아 있던 감은사지 동탑 복원도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

당시 동탑은 천년의 세월을 견디는 동안 탑신이 심하게 부식돼 웬만한 석공들은 감히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한 국보였기에 동탑에 들인 그의 공은 대단했다.

같은 재질의 석재를 구하기 위해 6개월을 꼬박 돌 찾는 일에 매달려 왔고, 경주 남산과 울산의 경계인 마석산 자락에서 원석에 버금가는 돌을 찾아냈을 때는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뻤다.

동탑 복원 과정에서도 기중기를 이용하는 현대식 방법 대신 전래방식인 드잡이방법으로 탑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예술의 최고 걸작품, 국보 제 112호 감은사(感恩寺)탑이 그의 손에 의해 1천300년의 잠에서 깨어났다.

이밖에 91년 통도사 경내 고려유물인 5층폐탑을 보수 복원했고, 그해 경남 창령군 계성면 청련사에 원형 크기의 다보탑 불사를 완성함으로써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소년원에서 돌일을 하다 들어온 동기녀석에 이끌려 장난삼아 시작한 것이 '돌쟁이'의 시작이었습니다".

경남 울주군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윤명장은 가난이 싫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고, 밑바닥생활을 전전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두운 과거지만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 낙천적인 성격도 돌과 닮았다.

문화재 수리기능사, 조경기능자, 드잡이 자격, 석공예기능사, 석조각기능사 등 각종 석조부문 자격으로 95년 명장으로 선정된 윤만걸씨.

"우리나라에 석공들은 많지만 전통기법을 연구하고 제대로 배운 사람이 드뭅니다".

돌쟁이로서 이루지 못한 것이 없지만 그에게는 풀어야할 큰 숙제가 남아 있다.

"돌일이 힘이 들고 보수가 적어 막상 큰맘 먹고 일을 시작한 젊은이들이 며칠 못가 그만두기 일쑤고, 수입이 나은 건축계통으로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최근 그는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기 위해 공적내용을 모아 문화재청에 자료를 신고했다.

개인의 욕심보다는 돌일을 배우려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올바른 방향제시를 위해서다.

그의 투박한 얼굴 만큼이나 우리 것에 매달려온 열정에서 진정한 장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경주.이채수기자 cslee@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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