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그리운 선생님

해마다 스승의 날이 오면, 지나간 추억에 대한 그리움과 죄스러움 속에서 선생님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 하면서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스승의 은혜' 노래도 함께 부르곤 한다.

그러나 나는 늘 죄스러운 생각으로 지난날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에 잠긴다.

나는 그때의 선생님을 그리워하기만 했지, 은혜에 대한 보답은 너무나 소홀했다.

철없던 시절은 용서와 관용으로라도 이해가 되겠지만, 이젠 그것도 아닌 세월만 덧없이 흘려보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쯤 되겠다.

그때가 바로 한국전쟁 직후였으니까 혼란한 사회와 폐허가 된 건물더미 속에서 먼지를 마시며 공부했다.

내가 다닌 안동D초등학교 6학년 2반, 교실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고 공부를 했던 시절이다.

담임이신 이영진 선생님은 우리들을 겨우 한 학기만 가르치시곤 어디론가 훌쩍 떠나신 것 같다.

헌칠한 키에 미남이셨으며, 참으로 열심히 가르쳐 주셨다.

선생님은 특히 미술에 소질과 취미가 많으셨던지, 그림 지도를 참 잘 해주셨다.

주로 정물이나 인물, 그리고 풍경을 많이 그렸던 것 같다.

그때 나도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 찢어지게 가난하였으므로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그림물감이랑, 붓이랑, 팔레트를 사주시면서 격려해 주셨다.

"부성이는 그림에 소질이 있구나. 장래에 훌륭한 화가가 되겠어".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각종 미술대회에서 여러 번이나 입상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시던 모습도 어렴풋이 생각난다.

가난 속에서 서러움과 외로움밖에 모르고 자라던 나는 얼마나 고맙고 기뻤는지 모른다.

그 후, 나는 그림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였으며, 그 소질을 조금씩 계발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Y대학원에서도 미술 교육을 전공했다.

현재, 한국미협회원, 대구초등미협회장 등 미술 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때 선생님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과연 가능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돌이켜 보면, 초등학교 때의 담임 선생님의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이 선생님의 은덕임을 한번 더 절감하게 된다.

참으로 고마우신 선생님이셨다.

'선생님,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살아 계신다면 여든 살은 훨씬 넘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옥체 건안하신지요? 이 철없는 제자가 선생님을 진작 찾아 뵙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됩니다.

거실벽에 걸린 유화 작품 한 점을 선생님께 고이 바치고 싶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디 만수 무강하십시오'.

나는 훌륭한 선생님의 도움으로 교사가 되었지만, 선생님만큼 제자들에게 베풀어주지 못했다.

이제 정년을 눈앞에 두고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니, 참으로 많이도 변했다.

물질적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지만, 정신적으로는 꼬리가 안보일 정도로 퇴보되었다.

교실에서 컴퓨터로 인터넷에 들어가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최첨단의 정보화 시대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인성은 너무나 삐뚤어져 있다.

선생님이 자기를 체벌했다고 경찰에 신고하는 학생, 졸업생이 모교에 찾아가 스승을 살해하는 흉포한 세상으로 전락하였다.

참으로 소름끼치는 허탈한 현실이다.

교사는 이제 더 이상의 스승이 아니라 지식과 졸업장을 파는 직업인으로 비쳐진 것 같다.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빛은 그저 희망 사항일 뿐, 이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누가 교단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었을까? '교육 부재', '교실 황폐화'라니 듣기만 하여도 피하고 싶다.

조석으로 바뀌는 교육 정책 때문일까? 아니면 무질서한 사회의 구조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교육을 '백년지대계'라던 슬로건은 어디에 갔는지.

우리의 교육, 우리의 지혜로 심사숙고하여 후회 없는 교육으로 회복하자.

배부성〈대구수필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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