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초반, 경북 고령군 고령읍 고령경찰서 '무덕관'.
고분에서 나온 금(동) 장신구, 토기, 무기류, 말 장구 등 유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일제말, 당시 10대 후반 한 젊은이가 우연히 이 현장을 목격했다.
김도윤(80·경북 고령군 고령읍)씨는 "유도관에 1t트럭 2, 3대 분량의 유물이 쌓인 것을 봤다"며 "대구 남선전기 사장으로 있던 일본인 오구라가 도굴품을 경찰서에 임시 보관한 것이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일제가 전국적으로 '합법적 발굴'을 내세워 모은 유물과 도굴품이었다.
그로부터 약 40년 뒤 일본 도쿄박물관에는 오구라 노스케(1870~1964)가 수집한 1천100여점의 한국산 유물이 기증(1981년)됐고, 그 중에는 대가야 유물로 보이는 금관 1점과 금동관 2점도 선보였다.
1963년 검찰은 경북 달성군 현풍에서 문화재 도굴을 일삼던 일당을 적발했다.
당시 이들이 도굴했던 대다수 문화재는 국고로 환수됐으나 대가야 금관으로 추정되는 관(冠) 등 일부 유물은 경로가 밝혀지지 않은 채 빠져나갔다.
10년이 지나지 않아 이 금관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호암컬렉션이 특별 전시(1971년)될 때 모습을 드러냈고, 같은 해 국보 138호로 지정됐다.
대가야 왕들이 쓰던 금(동)관은 이처럼 출토지나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바다 건너로, 또 개별 미술관으로 흩어져 그 때의 역사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다.
얘기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가슴아픈 심정이야….
숱한 도굴에도 불구하고 무덤안에서 제자리를 지킨 금동관이 발견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지난 94년 고령 지산동 30호 고분을 발굴하던 영남문화재연구원 관계자들은 경악했다.
무덤에서 이례적인 유물을 발견한 것이다.
껴묻이(순장) 돌널에서 띠 고리(帶輪) 15Cm의 자그마한 금동관이 나왔다.
주인돌방이 아닌 돌널에서 관이 나온 적이 없는데다 소아용 관은 더욱 흔치 않았던 것. 금동관과 함께 나왔던 사람 뼈는 3~11세 가량의 어린 아이의 그 것이었다.
박승규 영남문화재연구원 연구실장은 "이 소아는 무덤 주인공의 노비나 하층계급 신분으로 추정되고, 금동관을 쓸 수 있는 신분의 사람을 대신해 껴묻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주체를 무덤축조 기간중 숨진 왕의 자녀 또는 왕족으로 보는 시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에 앞서 지난 78년 계명대가 발굴한 지산동 32호 고분에서는 대가야 왕이 썼던 금동관이 유일하게 주인돌방에서 확인돼 눈길을 모았다.
대가야의 관(冠)은 이처럼 출토지가 확인된 지산동 30호, 32호 금동관을 비롯해 고령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지는 호암미술관 소장 금관, 도쿄박물관 소장 금(동)관 3점 등이 있다.
또 고령 지산동 45호 고분과 30호 고분의 주인돌방에서도 금동으로 만든 솟은 장식과 관에 쓰인 금동 조각 2점이 각각 발굴돼 금동관의 존재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다.
'초화보주형(草花寶珠形) 입식관'은 대가야 관의 특징이다.
풀잎이나 꽃잎 또는 풀꽃 모양의 솟은 장식(立飾)이 금(동)띠 고리에 꽂혀 있고 정상에는 양파모양(寶珠形)의 봉오리가 올라앉아 있다.
또 대다수 외관 안쪽에 내모(內帽)가 있는 것이 독특하다.
신라 관의 '출(出)'자나 새날개(鳥翼) 모양의 솟은 장식과 뚜렷이 구분되는 셈이다.
호암미술관 금관은 전체 길이 67cm의 금띠 고리(環帶)에 네 개의 솟은 장식이 앉아 있다.
띠 표면 아래 위에는 두드려 찍은 작은 점(陽点)들이 두 줄로 평행선을 이루고 그 사이에는 수많은 점이 교차하고 있다.
금띠 고리와 솟은 장식 표면 곳곳에는 40여개의 달개장식(瓔珞)이 달려 눈길을 끈다.
띠 둘레에는 10여개의 굽은 옥(曲玉)이 달려 있지만 이는 출토 후 복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머리(牛頭) 장식 4개, 반구형 금장식 8개 등 금관 부속장식도 함께 나왔다.
사학자들은 전남 나주시 반남면 독무덤(甕棺墓)에서 나온 백제식 금동관(국보 295호)도 풀꽃 형태의 솟은 장식 정상에 양파 모양이 곁들여져 호암미술관 금관과 비슷한 양식으로 보고 있다.
호암미술관 금관은 고형(古形)인 나주 관을 단순화시킨 형상이라는 것.
또 오구라가 수집한 도쿄박물관 금관도 호암미술관 금관보다 솟은 장식이 훨씬 작고 간단하지만 풀꽃과 양파 모양인데다 달개장식이 달린 것으로 미뤄 같은 형식으로 분류된다.
고 김원룡씨는 71년 국립박물관에 전시한 호암미술관 소장 금관을 두고 "초화형 입식, 우두형 장식 등 전형적 대가야 금관"이라며 "나주의 백제식 금동관과 일본 도쿄박물관 금관의 중간쯤 위치할 수 있는 양식"이라고 분석했다.
지산동 30호 고분의 소아용 금동관은 3개의 솟은 장식, 4개의 달개장식 등 대가야 관의 형식을 두루 갖췄고, 띠 고리 양끝에 뚫린 구멍은 끈이나 가죽을 연결해 관을 착용했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이 관은 특히 순장의 성격과 매장방식, 관 착용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불러왔다.
지산동 32호 고분의 금동관은 띠 고리 정면에 솟은 장식이 넓게 형성된 '광배형(光背形)' 관으로 독창성을 보이고 있다.
대가야 형식의 '풀꽃 모양' 솟은 장식에 신라식 '출자형' 장식이 가미된 복합형 관으로 주목받았다.
솟은 장식 윗부분은 양파모양에다 '앵무새 부리형' 돌기(突起)장식도 곁들여져 있다.
5세기 전반에서 6세기 중엽에 걸쳐 왕이나 왕족과 함께 묻힌 금(동)관. 이 관들은 금관가야가 물러난 뒤 대가야가 서서히 세를 모으기 시작해 최고의 세력으로 군림하던 기간 대왕이나 왕족의 위용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고령·김인탁기자
사진 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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