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현장 이곳!-울산 대곡리 유적 발굴

국내 최대 고분군이 발견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발굴 현장. 경부고속도로 언양 톨게이트에서 승용차로 약20분쯤 가다보면 산골짜기 시뻘건 황토 벌판에 100여명 조사원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면서도 사뭇 신중하다.

얼핏 산림복구 현장같기도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반평 남짓한 구덩이마다 조사원들이 붓과 흙칼을 사용해 조심스레 유물을 수습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문화재 발굴현장. 거대한 역사(歷史)의 땅을 해부하는 현장 조사원들의 손길은 늦가을 짧아진 해에 쫓기는 듯도 하지만 표정에는 엄숙함이 배어있다.

◇국내 최대의 발굴현장

울산시와 수자원공사는 울산권 광역상수도 취수원 개발사업을 위해 지난 1994년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일대에 저수용량 3천850만t 규모의 대곡댐을 건설키했다.

그러나 지난 1998년 9월부터 2개월 동안 창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이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청동기시대 유적과 조선시대 가마터.야철지 등 20개소에 달하는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울산시 상수도사업본부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 시굴조사에 이어 발굴조사를 의뢰, 지난 2000년 3월 1차 발굴조사 이후 지난 7월까지 3차례 발굴조사를 완료했고 현재 4.5차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조사된 유구는 1차 건물지, 담장지 등 113기, 2차 가마 등 145기, 3차 석곽묘.목곽묘 등 126기, 4차 주거지.목곽묘.옹관묘 등 약600여기(현재 조사중), 5차 수혈유구.제련로.숯가마 등 약30기(조사중) 등 모두 1천300여기가 발견됐다.

더욱이 현재 4.5차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어 조사결과에 따라 유구의 수는 증가될 전망이고, 이 현장에 대한 모든 발굴조사가 완료된 후 최종적으로 예상되는 대곡댐 전체 조사유구는 약 1천500~1천600여기에 이른다.

출토 유물도 국내 최대 규모다.

◇출토유물도 최대

1차 토기.자기.금속류 등 830점, 2차 기와류.옹기류 등 1천800점, 3차 장신구류 등 850점, 4차 철기류 등 7천300점(현재까지 수습된 유물), 5차 토기.자기류 등 1천점(현재까지 수습된 유물) 등 총 1만780점이고 4.5차 발굴조사가 완료되면 유물의 수가 더 늘어날 것은 분명하다.

관계자들은 전체지역 발굴조사가 완료되면 약2만5천~3만여점이 수습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래서 이 발굴현장은 규모면에서 국내 최대일 뿐아니라 역사, 문화, 고고학적 가치도 크다는 것이다.

수천기의 고분군이 밀집된 채 발견된 것은 처음이어서 문화재당국과 발굴기관.고고학계의 관심도가 이곳에 집중되는 것도 당연하다.

◇고고학적 의미도 중대

그래서 최종 발굴조사 후 지도위원회를 통해 규명이 되겠지만 이 일대가 신석기에 이어 청동기시대부터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울산지역을 대표하는 강력한 정치집단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출토된 유물들의 성격을 볼 때 옛 울산도 공업 등 산업 활동이 풍부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 일대 인근인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서쪽 일대를 신라 6부 중의 한 부의 근거지로 보는 견해도 내놓고 있다.

고대인들은 교통 통로와 주거지를 생산이 이뤄지는 평야를 중심으로 했음을 볼때 신빙성 있는 주장이다.

언양 일대 평야는 신라의 옛 수도 경주와는 불과 25km 떨어져 있어 국도 35호선이 그 당시 통로로 이용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세워보기도 한다.

특히 이 현장 일대는 계곡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는데 이 고분군은 계곡 하부가 아닌 상부에 위치, 당시 사람들의 묘제를 조성하기 위한 지형적 선택을 고려한 점도 엿 볼 수 있다.

◇현장 조사원들의 애환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있는 귀중한 발굴현장인 만큼 조사원들의 손길도 겨울을 앞두고 분주하면서도 신중한다.

한점의 유물을 수습하는 것은 젖먹이 아기를 돌보는 심정과 같다는게 현장 조사원들의 얘기다.

이곳에는 처음부터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소속의 책임조사연구원 김수남씨를 비롯한 조사원 10여명과 보조조사원 70여명이 매일 투입돼 조사를 벌이고 있다.

조사원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다.

주말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자녀들과 아내에게 영점 아빠와 남편이 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또 인근에 민가나 숙박시설이 없어 언양읍에 숙소를 정해 매일 계곡으로 출근하는 애로를 겪고 있다.

날씨가 좋은 봄.가을은 그래도 작업하기에 큰 불편이 없지만, 겨울 산골짜기에서 거센 찬 바람이 몰아칠 때면 천막이 날라가고 장비들이 흩어지기가 일쑤여서 유물 수습이 아닌 현장 수습에 정신이 없다는 것. 또 여름철 예고없는 폭우가 쏟아질 때면 모든 현장 근무자들이 발굴현장에 빗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덮개를 치는 등 소동이 빚어진다는 것이다.

더구나 현장의 면적이 1만여평이나 되니 그 고충을 알만하다.

이런 악조건을 4년째 책임지고 있는 김수남 책임연구원은 그래서 "고고학은 고고(孤高)한 사람이 아니면 하지 못한다"며 귀중한 역사환경의 지킴이들의 고초를 털어놓았다.

"매장문화재 현장 중 고분군 발굴을 실시할 때는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는 공동묘지 즉 고분군은 하층민들의 묘역이고 여러시대에 걸쳐 매장이 이뤄지기 때문에 이에 걸맞은 다양한 유적과 유구가 발견되곤 해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며 현장 경험을 토로했다.

대곡리 현장도 약 5세기(AD2~7세기)에 걸쳐 매장이 이뤄져 한 유구 발굴이 끝나면 그 아래 또 다른 유구가 있는 중첩(重疊)구조로 형성됐다는 것.

◇땅 속 역사는 끝까지 파보아야…

그래서 조사원들은 땅 속의 역사는 끝까지 파 보아야만 그 실체를 알 수 있다는 부담을 가지고 산다.

특히 대곡리 현장의 경우 군입대 전에 조사를 했던 조사원이 군복무를 마친 후에도 같은 현장에 투입되는 장기전이 펼쳐지고 있고, 또 조사보고서 발간에도 수년간 소요되는 악전(惡戰)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김수남 책임연구원은 "최종 보고서 작성에 모든 현장 연구원이 또다시 투입돼야 하고 출토 유물처리를 위해 전시관 건립 등 현안이 잇따르는 것은 물론 책자가 발간 돼야만 모든 것을 훌훌 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대곡리 역사의 실타래가 풀리려면 2010년쯤이 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런 전망을 내놓았다.

지난 1999년 발굴 시작 이래 3년7개월이 지났고, 당초 올 연말까지 기간도 부족해 여섯달을 더 보태야 발굴이 완료될 대곡리 발굴현장. 예측 불허의 상황이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지만, 역사와 현실이 교차하는 진실의 현장에서 조사원들은 오늘도 역사의 땅을 해부하고 있다.

울산.윤종현기자yjh0931@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