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티모르 리포트(하)-민간원조는 '장기투자'

딜리시에선 차들이 다니는 거리 한 편으로 들개와 돼지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닌다.

직업을 찾지 못한 청년들은 뙤약볕을 피해 하릴없이 거리에서 시간을 보낸다.

물가는 이웃나라인 인도네시아의 2~4배에 이를 정도로 높다.

이곳에 주둔한 평화유지군들이 구호차원에서 현지인들의 임금을 턱없이 올려놓은 탓이라고 한다.

학교, 고아원, 병원시설의 열악함은 고사하고 단 하나뿐인 국립대학 도서관의 책꽂이에 있는 책이 절반이 채 안된다.

다량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지만 국민들이 그 수혜를 얻으려면 10~20년은 걸린다고 한다.

언제 있을지 모를 다국적군의 철수. 현재 동티모르는 기존 각국 정부의 원조뿐 아니라 민간차원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병원과 학교가 가장 절실

"전쟁이 남긴 가장 큰 희생자는 아이들과 여자들입니다.

그러나 현재 동티모르 정부는 여기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습니다".

가정폭력 추방, 어린이 보호 등 인권운동을 위해 지난 2001년 설립된 '알로라(ALOLA) 재단'의 크리스티(41.여)이사장. 호주태생인 그녀는 현 구스마오 대통령의 부인. 남편과 함께 동티모르 독립 게릴라 활동을 한 인물로 국민적인 추앙을 받고 있다.

그녀는 "현재 동티모르는 외국의 원조에 전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다"며 "이런 실정은 병원과 학교에서 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티모르에 있는 2곳의 병원 가운데 하나인 딜리 국립중앙병원. 이곳 산부인과 의사인 바스코타(44.네팔) 박사는 산부인과 병동과 소아병동 내부를 소개하며 척박한 의료사정을 설명했다.

"이곳 부모들은 적게는 4,5명에서부터 8~10명 넘게 아이를 낳습니다.

그중 50%가량이 체중미달, 영양실조 등을 겪고 있으며 이 중 상당수가 말라리아, 기관지염 등 감염성 질병으로 인해 사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 6월 한국이 원조해준 인큐베이터 6대 덕분에 이 병원의 유아사망률이 한 때 15%에서 6%로 뚝 떨어진 사례를 들며 의료기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현재 260명의 환자를 맡고 있는 이 병원 의사 28명 가운데 티모르인 의사는 단 5명. 바스코타 박사는 "의료기기, 의사, 간호사, 약품 어느 것 하나 충분한 것이 없다"며 정부.민간차원에서의 원조를 한국에 부탁하기도 했다.

딜리시 인근 '엘메라'지역 파이떼 초등학교의 페르난도(60) 교장은 이 학교 전교생 313명 가운데 200여명이 전쟁고아라고 털어놨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나무열매를 따거나 텃밭을 일구고 한 묶음에 10센트하는 땔감을 내다 팔아 하루의 양식을 마련한다고 했다.

86명인 1학년에 반해 6학년은 고작 22명. 대부분 고아들이 학교를 집 삼아 다니다 나이가 들면(?)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내려간다고 했다.

실제 이런 아이들 상당수가 관광객이나 주둔 외국군인을 상대로 전화카드, 담배, 성냥 등을 팔기 위해 시내를 배회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딜리 시내에서 30분 가량 떨어진 술래우르 지역에 위치한 마리니드 베르타시 초등학교도 전교생 547명 가운데 50여명이 전쟁고아다.

알폰소 수와레즈(37) 교장은 "현재 15명의 교사가 있지만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교실은 절반가량"이라고 했다.

팩스.컴퓨터가 없는 이곳에선 교사들이 걸어서 타 지역에 공문서를 전달하다보니 수업을 비우는 일이 잦다는 것. 그는 "학교급식은 생각조차 할 수도 없고 하루에 감자 두 개로 끼니를 때우는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6천여명의 학생들이 다니는 동티모르 국립대도 열악한 사정은 마찬가지. 마테우스 다 크루소(45.농학) 교수는 "가장 기본적인 교재, 컴퓨터, 실험도구, 실험실마저 부족하다"며 "동티모르의 미래인 청년들을 교육시키고 싶지만 현실적인 과제가 너무나 많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민간차원의 원조 절실

"이제는 민간차원에서의 한국-동티모르간 협력관계가 시작되야 합니다".

유진규(56) 주 동티모르 한국대사는 최근 이라크 파병이 최대 이슈로 떠오른 상황에서도 기왕에 쌓아올린 양국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유 대사는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서 물러간 후 여러 열강과 주변국들의 투자를 위한 발걸음이 바빠지고 있다고 했다.

티모르 해협의 석유와 천연가스 이익을 노린 일본과 호주는 일찌감치 수억달러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고, 그간 관망만 하던 미국도 군사전략상의 이유를 내세워 뒤늦게 대사관을 짓고 있다는 것. 인근 중국, 말레이시아, 태국 등에서도 원조물품이 쏟아지고 있다고 했다.

주 동티모르 외국 대사관, 영사부, 총영사관만도 92개국에 달한다는 것.

유 대사는 "그간의 우리의 노력을 유지해주기만 해도 한국은 향후 동티모르 재건에 참가하면서 막대한 투자이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며 "이제는 한국 정부뿐 아니라 민간 단체들의 기부와 원조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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