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재촉하는 비를 무릅쓰고 김천서 거창으로 가는 국도를 내달렸다.
늦가을의 운치를 느긋하게 즐기기에 좋은 코스다.
김천시 지례면 교리, 지례면소재지 소방파출소 뒤편에 있는 반곡 장지도, 절효 윤은보, 남계 서즐 세 분의 정려각에 닿았다.
그러나 도착 순간 가을의 운치는 스산함으로 바뀌었다.
보존 상태가 너무도 허술했기 때문이다.
이 정려각은 1432년(세종 14년) 윤은보와 서즐이 스승인 반곡 장지도를 어버이처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스승이 죽자 3년간 시묘살이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종이 내린 것이다.
정려각은 전국적으로 수백개에 달한다.
그러나 대부분 충신.효자.효부.열녀 등을 기리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효를 기리는 정려로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특히 이들 사제간의 효 얘기는 충신.효자.열녀 등의 행실을 수록한 삼강행실도에도 유일한 사례로 기록돼 있다.
스승 장지도와 제자 윤은보, 서즐은 김천 지례 출신이다.
장지도는 고려말 공민왕때 진사문과 급제후 기거주지의 주사(현 국정교과서 편찬위원)에 올랐다.
이후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교서소감(종4품)에 올라 일종의 정치교과서를 집필했으나 당시 정치 혼란과 참상에 환멸을 느껴 낙향해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이 때 윤은보.서즐과 사제의 연을 맺었다.
스승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두 제자는 "우리를 사람답게 길러준 분을 우리가 모시지 않으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라며 스승을 아버지처럼 극진히 모셨고 세상을 떠난 후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두 제자는 스승의 묘가 있는 지례면 상부1리의 봉화재를 자주 오르내렸다.
이 때문에 봉화재는 지금도 '정성고개'로 불린다.
정려각은 45평 터에 3평 크기 맛배지붕형으로 세워져 있다.
정려각안에는 윤은보.서즐과 관련한 소나무 정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정려각 옆으로는 사제를 기리는 유허비와 지례현감 4명의 선정비가 나란히 서있다.
정려각 곳곳은 보수 흔적이 역력하지만 어슬프기 짝이 없다.
개량 기와로 얹혀 있던 지붕을 뒤늦게 전통기와로 바꾸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키 267㎝, 폭 90㎝의 유허비도 화강암에 거북과 쌍용을 새긴 기단과 상륜부는 옛모습이지만 비신부는 해강석이다.
당초 건립후 300여년 뒤 새로 끼워 맞춘 듯하다.
기단과 상륜부엔 돌버섯이 까맣게 내려앉아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다.
옆에 1558년(명종 13년) 세워진 지례현감 4명의 선정비도 돌버섯때문에 탁본을 않고는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이곳 앞으로 뒷산 계곡의 물을 흘려보내는 폭 70여cm의 수로가 놓여있어 습기로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
정려각 위치가 부적절함을 금방 알 수 있다.
보존 상태가 엉망인 건 세월 탓도 있지만 지정 문화재가 아닌 향토유적으로 분류돼 국가가 관리하지 않은 때문이다.
지난달 말 김천시는 도비 보조사업으로 4천만원을 들여 정려각 보수공사에 나섰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지정문화재가 되지 않는 한 일시적인 관심에 그칠 공산이 크다.
또 몇차례 손댄 흔적으로 미뤄 당시 관련 유산들이 이 일대에 묻혀 있을 수도 있다.
향토사는 지례현감의 선정비가 30여개인 것으로 전하지만 현재 남은 것은 4개라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사제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새기는 유적이 온전히 보존되기를 기대한다.
김천.이창희기자 lch888@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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