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밖에서 배운다-육신사

어떤 역사적인 사실이 드라마나 소설 못지 않은 극적인 요소를 가질 때가 많다.

역사적인 사실을 역사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듣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산 교육이 된다.

달성군 하빈면 묘1리의 육신사를 찾아가 보자. 400년의 세월 속에 묻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가 더해질 것이다.

▲육신사란

육신사는 조선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에 앞장선 사육신의 한 분인 박팽년 선생과 나머지 다섯 분(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을 모신 사당을 일컫는다.

처음엔 박팽년 선생의 아들이자 사육신 중에서 유일한 후손인 박일산에 의해 박팽년 선생만 모셔졌다.

훗날 박팽년의 손자인 계창에 의해 나머지 다섯 분이 사당에 모셔지게 되었다.

사육신의 다섯 분이 사당에 모셔지게 된 일화가 재미있다.

바로 계창이 할아버지의 제삿날 밤 꿈에 사육신이 굶주린 배를 안고 사당 밖을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놀라 깨어나 다섯 분의 제를 같이 올리게 됐다는 것. 이후 하빈사라는 사당을 짓고 지금까지 전해져 오게 된 것이다.

▲박팽년의 후손 박일산

세조에 의해 박팽년의 가문 역시 멸문지화를 당했다.

박팽년과 이조판서였던 아버지 중림, 4형제인 인년, 기년, 대년, 연년과 박팽년의 아들 헌, 순, 분 등 모두 3대 9명이 화를 당하고 부녀자들은 모두 관청의 노비가 되었다.

박팽년의 둘째 아들인 박순의 아내(성산이씨)는 친정이 달성군 하빈이었다.

친정이 가까운 달성으로 와서 관비로 있던 중 아이를 낳게 되자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관비로 몰수하라"는 어명이 내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기는 아들이었고 이 때 우연히 부인의 종이 딸을 낳아 서로 바꾸어 길렀다.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진 박팽년의 손자는 박씨 성을 가진 노비라는 뜻으로 '박비'라 불리워지고, 그 후 박비의 이모부인 이극균이 경상도 관찰사로 와서 박비에게 신분을 드러낼 것을 권하였다.

이런 권유는 세조 이후 성종이 사육신에 대한 평가를 긍정적으로 하던 시기와 맞물린 것이다.

박비가 성종에게 박팽년의 후손임을 털어놓자 곧바로 충신 칭호가 내려졌고 사육신의 유일한 후손이라는 뜻에서 박일산이란 이름도 지어졌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박일산은 외가의 재산을 물려 받아 99칸짜리 종택을 짓고 묘골에서 후손들을 번창시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540여년간 대를 물려온 이곳은 한때 300여 가구이던 것이 지금은 30여 가구 남짓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영남의 대표적인 양반 마을이다.

▲볼만한 문화재

육신사에 들르면 먼저 건물과 어우러진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다.

99칸 널찍한 터에 건물 사이사이로 솟아난 푸른 대나무밭, 기와나 돌담에 낀 이끼들이 멋스러움을 더해준다.

도곡재와 금서헌도 볼 만 하지만 태고정을 빼놓으면 안 된다.

태고정은 성종10년(1479)에 박일산이 종택에 딸린 정자로 세운 건물이다.

보물 제544호로 약 650평의 너른 터에 건물 2동(30평)이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서 눈여겨볼 것은 지붕에 두가지 양식이 합쳐져 있다는 점. 정자의 오른쪽은 한자의 여덟팔자 모양 팔작지붕으로 지어졌으나 왼쪽은 지붕이 서로 맞닿아 있는 맞배지붕에다 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고정시켜 달아낸 부섭지붕으로 처리한 보기 드문 정자이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일부가 타버려 선조 29년(1596)에 새로 지어졌다가 광해군 6년(1614)에 중건한 건물이다.

비록 중건한 것이지만 400여년 전의 건물을 보는 즐거움엔 문제될 게 없다.

다시 묘골 입구로 나와서 오른편 지름길로 작은 고개를 넘으면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는 묘동 박황 가옥이 있다.

▲찾아가는 길

여러 갈래지만 대구에서 성주 가는 국도에서 하빈으로 가는 우회전 길인 67번 도로를 타고 10여분 가다보면 하빈교 지나 오른쪽에 육신사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김경호(체험교육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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