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비가 많았던 지난 여름, 태풍 '매미'는 기어이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아직도 발길 드문 벽촌엔 가로수가 누워 있고, 졸지에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수몰지엔 잡초만 무성하다.
뿐만이 아니다.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기고 간 사건들, 이미 겨울은 바짝 다가만 오는데 이곳저곳에는 못다 아문 상처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다시금 지하철을 찾았다.
역사 앞 '백화점'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지만 바로 밑 지하도엔 지금도 매캐한 냄새가 풍긴다.
한 정신병자의 방화로 빚어진 참사의 현장, 타다만 재는 말끔히 치워졌지만 정적의 지하도엔 죽음보다 무서운 전율이 흐르고 있었다.
잊혀져 가는 아비규환, '어머니, 여기는 연기가 자욱한 지옥입니다.
절대로 오지 마세요'. 마지막 핸드폰을 타고 흘렀던 어느 소녀의 가녀린 목소리. 이렇듯 사랑하는 사람들은 한줌의 재로 화했고 남겨진 가족들의 가슴은 천추의 한이 되어 있었다.
신문을 펼쳤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파병을 둘러싼 정객들의 입씨름 속에 전후의 '바그다드'는 또 다시 공포의 도시로 변했고 갖가지 국론분열로 국민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대선자금, 부정부패, 측근비리, 단식농성에 이어 FTA(Free Trade Agreement, 자유무역협정)를 둘러싼 극한 대립과 자결(自決), 급기야 핵폐기매립장 설립의 찬반을 두고 부안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번지고 있다.
자유와 평화, 삶과 죽음, 극도의 민심이반(民心離反)-비록 시공을 초월한 각기 다른 삶의 현장이지만 곳곳의 아비규환은 '매미'가 남긴 상흔(傷痕)과 함께 다가오는 겨울마저 망각하고 있다.
답답한 마음에 또다시 팔공산 갓바위를 찾았다.
두 손 모아 합장하는 마음이야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반석(盤石) 위 좌불상 부처님이 자꾸만 기울어져 간다.
팔공산 정기를 한 몸에 지닌 채 어지러운 불자(佛子)들의 마음을 추스르고 추스르는 영험의 불상. 있음의 의미 하나만으로도 무량무변(無量無邊)의 도량(度量)을 헤아리기 어렵거늘 좌불상(坐佛像)-석대(石臺)가 또다시 기울고 있다.
짐짓 아직도 아물지 못한 중생의 고통을 홀로 짐진 탓일까. 자꾸만 기우는 좌불상-석대가 불안하다.
부처님 앞 소청의 눈빛들은 바위만큼 무거워 보이고 합장한 두 손엔 땀이 배였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팔정도(八正道)-중생의 고통은 탐(貪).진(瞋).치(痴)에 있다고 했다.
불가에서 말하는 탐, 진, 치는 삼독(三毒)이니 일러 욕심, 성냄, 어리석음을 이름이다.
태풍 '매미'야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라지만 시공을 초월한 중생들의 아비규환은 무엇인가. 비록 해탈이나 열반과는 거리가 먼 중생들이지만 팔정도엔 정견(正見)"올바로 보는 것", 정사(正思:正思惟)"올바로 생각하는 것", 정어(正語)"올바로 말하는 것", 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는 것", 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정근(正勤:正精進)"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정념(正念) "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 이 있음을 깨우칠 일이다.
창 틈 사이에 서둘러 붙여 둔 문풍지가 요란하게 떨고 있다.
길고 긴 겨울이 시작될 모양이다.
겨울은 바짝 다가만 오는데, 아직도 못다 아문 상처는 너무도 많다.
'건너가자 건너가자 넘어서 건너가자 모든 것을 넘어서 건너가자 그 곳에 공의 깨달음이 있느니라'. 부처님의 말씀이 가슴에 깊이 새겨지는 요즈음이다.
백천봉(수필가.대구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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