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이다. 이제는 가을이 반도의 끝자락에 간신히 남아 있을 것이다. 아직도 가을에 미련이 남아있다면 남도로 떠나자. 절 풍경 사진의 대명사 승선교가 있는 선암사에는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고 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선암사 입구 숲길은 빛 바랜 나뭇잎조차 떨쳐 버린 참나무, 삼나무 가지들이 푸른 하늘을 향해 뾰족한 창을 겨누고 있다. 왼쪽으로 흐르는 개울물소리에 걸음을 맞추고 제법 되는 숲길을 걷다 보면 승선교(보물 제 400호)와 강선루가 그 끝자락에 있다.
한껏 기대를 가지고 간 무지개다리는 지금 해체.보수공사중이서 그 모습을 볼 수 없고 공사를 위해 설치한 철판앞에 붙여진 사진으로 만족해야 한다.
강선루를 지나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름드리 전나무 세그루가 까마득한 높이로 서 있고 그 밑에 알모양을 한 연못이 있다. 도선국사가 팠다는 삼인당이다. 그 맞은편 절 담장 아래에 조그만 찻집 '선각당'이 아담한 나무 기와집에 자리잡고 있다.
일주문 오르는 길. 키낮은 차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차밭을 지나니 하늘 가린 삼나무 숲이 나타난다. 직립의 아름다움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일주문을 지나 아래를 보니 가지만 남은 나목들이 늦가을 광선에 반사돼 아름답다. 역광을 받은 나무기둥의 검은 무게에 대비된 가녀린 가지는 말그대로 한 폭의 동양화다.
숲은 그 때 그 자리에서만 제 빛을 발한다. 봄 숲이 순식간에 지나가듯 산사의 가을이 짧을 법 한데 선암사의 가을은 계절의 끝자락에 앉아 아직도 갈 곳을 몰라 한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던 정호승의 시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봄날이 가장 화려하다는 선암사지만 마지막이란 단어가 생각난다면 지금이 제격이다.
섬진강 휴게소서부터 같은 길을 오던 10여대의 버스에서 내린 등산객들이 우르르 절집을 휘젓고 다닌다. 조용하던 산사가 갑자기 소란스러워 법당 뒤로 돌았다. 가람뒤 언덕에서 편백나무에 기대 선 여인이 두터운 겨울외투를 벗어 팔에 건 채 상념에 잠겼다. 그녀도 눈물이 나서 이곳에 온 것일까? 법당뒤로는 온통 동백숲이다. 조계산에는 아직 단풍이 울긋불긋한데 겨울에 핀다는 동백이 벌써 몇송이 꽃을 피우고 있다.
한때 60여 가람이 계곡을 가득 메웠다던 대가람은 20여개가 남아 이제 단청이 다 바랜 채 세월의 무게를 반영하듯 회색빛이다. 산사가 평온을 되찾은건 등산객들이 서둘러 송광사로 넘어가는 굴목재를 향하고 난 뒤. 다시금 경내로 내려 온다. 조사당앞뜰에 서 있는 하얀목련에 싹이 트고 있다. 다른 가지에 아직 마지막 잎새를 달고 있는데 망울을 맺을 준비를 하고 있다니! 겨울꽃 동백이 피었고 봄꽃 목련이 싹을 틔우고 있는 이 자연의 조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불조전 처마에 달린 풍경소리가 목련을 깨웠나 보다.
해우소. 어느 절간에서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변소를 볼 수가 없다. 처마가 합쳐지는 아름다운 합각의 곡선에 '뒷간'이란 글씨를 고어체로 쓴 푯말 또한 걸작이다. 해우소를 지나 내려오니 산길이 나 있다. 가을의 절정이 그 산길에 고스란히 있다. 미련스럽게 남으로 내려 온 보람은 늦가을 절정의 단풍길을 보는 것만으로도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스님들의 수행처
돌담에 내려앉은 햇살을 받으며 이 계절 마지막 남은 가을길을 걸어 보면 눈물이 나서 찾아 왔던 선암사는 추억여행의 가장자리에 자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취재수첩
◆가는 길 : 구마고속도로→마산에서 남해고속도로→승주IC에서 내려 우회전→선암사로 가면된다. 가는 길에 주암호-상사호로 가는 길이 나온다. 선암사를 들른 뒤 호수 양편을 따라 달리는 호반도로는 그야말로 청정 드라이브 코스다. 특히 산을 적시는 노을을 받으며 즐기는 푸른 호수의 전경은 인기 코스.
◆영암 월출산과 광주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3대 명산으로 꼽히는 조계산(884.3m)은 동쪽에 태고종의 본산인 선암사, 서쪽에 승보사찰인 송광사를 안고 있다. 두 천년고찰을 연결하는 산중통로는 매우 아름답다. 6.8km의 거리로 4시간이면 넘는다. 명찰순례와 산행의 묘미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
◆선암사 앞길에는 할머니들이 대나무 꼬챙이에 곶감을 꽂아 파는데 맛이 일품이다. 10개 한줄에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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