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돈으로 얼룩진 정치현실

2003년의 막이 내려질 즈음 우리사회는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른바 정치불법자금을 둘러싼 정치권의 소요가 그 주된 원인이다.

불거져 나오는 비리의혹과 이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연일 모든 언론매체들의 톱뉴스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이를 주시하는 국민은 분노와 실망감으로 그저 허탈할 뿐이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대기업들은 각 당들에게 적게는 수십억에서 많게는 수백억씩의 돈을 건넸다고 한다.

대통령선거 한 번 치르면 기업들로부터 정치권을 향해 이동하는 돈이 수천억원에 이른다고 하니, 최근 연일 터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검은 돈의 액수를 보고 있노라면 전혀 근거없는 낭설만도 아닐 듯싶다.

기업들을 뒷조사하면 우리나라 경제가 무너질 것이라며 걱정하고 있지만 결국 그러한 기업부패의 고리가 무엇과 가장 유착되어 있는지 위정자들은 알고서나 하는 말일까. 불법자금과 관련한 정치인 조사에서 경제인 관련사실이 나오면 '확인하는 정도에서 그치자'는 어느 당대표의 말을 들으면 말문마저 막힌다.

'경제인의 사기를 너무 꺾어서는 안된다'는 애정어린(?) 우려인가. 경제를 활성화시키자는 뜻이라고는 하지만 정치에 불법으로 연루된 기업을 '확인 정도'로만 해주고 넘어가자는 발상은 정치인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기 위한 술책 외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정치권의 불법자금 문제자체를 아예 덮어두자는 말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전문직업인으로서 정치인의 직무유기다.

이러한 인물이 아직도 이 땅의 일개 정당대표로 군림한다는 사실이 서글플 따름이다.

경제를 보호하려는 정치권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으나 그것은 결코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없다.

이제껏 그런 식으로 대충 넘어갔기 때문에 결국 IMF 위기라는 어처구니없는 국가부도 마저 당하고만 것 아닌가. 정치가 눈감은 기업의 부패는 매번 선거철 때마다 막대한 불법 정치자금으로 변신하여 정치권에 흘러 들어가고 이러한 검은 돈은 다시 부패정치를 양산한다는 것을 위정자들은 다시금 각성해야 한다.

돈 없는 정치가 불가능한 것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그 양상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났었다.

절대적 빈곤의 시절엔 수많은 유권자들을 상대로 고무신과 막걸리 선거를 치르느라 돈이 들어갔지만 이젠 상황이 제법 달라졌다.

정치와 선거를 대하는 국민의 민주의식 수준이 예전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선거에 소요되는 돈의 액수는 실로 엄청난 규모로 팽창됐으니 도대체 그 많은 돈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최근 검찰의 조사에 따르면 수십억 또는 수백억씩 '트럭떼기' 또는 '차떼기'식으로 들어온 검은 돈들이 뭉텅이로 비닐 쇼핑백에 담겨 각 지구당들에 전달된 사실이 드러났다.

책임자들의 개인착복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돈을 관리하는 책임자들도 그 막대한 돈이 어디로 얼마씩 갔는지 기록도 없거니와 기억하지도 못한다고 한다.

돈에 얼룩진 대한민국 정치의 현실이다

한나라당 불법정치자금의 10분의 1이 넘으면 정계를 은퇴할 용의도 있다는 대통령의 가벼운 말이나,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마무리하려는 이회창씨의 투사적 말에서 우리는 여전히 보스 정치의 일면을 보고 있다.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다는 정치인들이 백마디 천마디 떠벌리고 있는 현실이 암담할 뿐이다.

순수한 열정으로 정치개혁을 하려했던 대통령의 발목을 잡은 일부 부패한 측근들이나, 본래 청렴한 공직자였던 이회창씨를 결국 정치폐인으로 만들고만 한나라당의 모순적 구조와 시스템이 이 땅의 정치를 돈 없이는 굴러가지 않는 정치로 만들고 말았다.

정치인 각 개인도 문제거니와 더욱 근본적인 것은 시스템의 문제이다.

정당간 당리당략이 국민의 민주복지와 상충할 때는 후자를 위해 과감히 체질개선을 해야한다.

정치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민을 위한 참된 정치를 실현시키려면 현재의 곪은 정치 시스템을 대폭적으로 개혁해야만 한다.

아픔과 고통 없는 개혁이란 있을 수 없다.

가까운 장래에 이제는 기업이 솔선해서 정당에 헌금하고 국민들도 이를 격려하는 그러한 대한민국의 정치를 희망해 본다.

최경진 (대구가톨릭대 교수.언론학)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