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되돌아본 '2003 대구'(5)-불법 대선자금 4대 키워드

올해 정치권을 풍비박산으로 이끈 불법대선자금 파동의 키워드는 단연 '차떼기'였다.

또 채권을 책포장 형태로 받았다 해서 '책포장'도 빼놓을 수 없는 유행어였다.

'차떼기'로 돈을 받은 한나라당은 '측근비리'의혹을 제기하며 "노무현(盧武鉉) 후보 캠프는 '밭떼기'로 돈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해, 불법자금 다툼이 '차떼기' 대 '밭떼기'간의 싸움으로 비화됐다.

또 이른바 '고해성사'도 이번 정국의 빼놓을 수 없는 핵심어다.

이회창(李會昌) 전 총재가 검찰에 자진 출두하자 이튿날 노 대통령이 "오십보 백보"라며 기자회견을 갖기도 했다.

"한나라당 불법자금의 10분의 1을 이상 받았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선언한 노 대통령의 발언 역시 정국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불법대선자금과 관련한 4가지 키워드, ①차떼기와 밭떼기 ②고해성사 ③측근비리 ④10분의 1 발언은 기존 정치풍토에 대한 정치 허무주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차떼기와 밭떼기=이른바 '차떼기'는 배추나 무 같은 농작물을 처분할 때 쓰는 말이다.

현금이 가득 담긴 2.5t 트럭을 통째로 받은 한나라당의 대담한 수법은 정치사에 오래 기억될 일이었다.

한나라당이 받은 것으로 확인된 불법 대선자금은 LG 150억원, 삼성 152억원(현금 40억원 포함), 현대차 100억원으로 402억원이고, 최돈웅(崔燉雄) 의원이 SK로부터 받은 100억원을 합치면 총 502억원이었다.

전달 수법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했다.

현대차의 차떼기 전달 상황을 재현해보자. 이 전 총재의 법률고문인 서정우(徐廷友) 변호사가 경기고 10년 후배인 현대차 최한영(崔漢英) 부사장에게 먼저 돈을 요구했고 이를 전해들은 현대 캐피탈 이상기(李相起) 사장은 사옥 지하 4층에 보관하고 있던 현금 100억원을 80개의 상자에 나눠 담아 스타렉스 승합차에 실었다.

현대 캐피탈측은 이틀에 걸쳐 서울 양재동 청계산 주차장으로 승합차를 옮겨 놓고, 최 부사장은 LG때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50억원이 실린 스타렉스 승합차를 저녁 때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으로 몰고 가 차키를 서 변호사에게 전달했다.

안대희(安大熙) 대검중수부장은 "스타렉스에는 한꺼번에 사과상자 80개가 들어가지는 않지만 더 큰 차를 이용할 경우 눈에 띌 것을 우려해 이틀 동안 전달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혀를 내둘렀다.

특히 부피가 큰 현금 대신 채권으로 112억원을 건넨 방식은 기상천외했다.

자기앞 수표의 두 배 크기인 1천만원과 500만원권 국민주택채권을 두 줄로 나란히 쌓은 뒤 상품 포장지로 곱게 싸, 책처럼 위장했다.

깔끔함과 치밀함을 볼 때 책포장이 차떼기보다 수법이 한 수위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허가낸 도둑당'이란 비난을 뒤집어쓴 한나라당의 대응도 흥미로웠다.

최병렬(崔秉烈) 대표는 "기업들이 한나라당에만 돈을 주고 노 대통령에게는 안 줬겠느냐"며 편파수사를 거론했고 이재오(李在五) 사무총장은 "대선 패자에게 '차떼기'로 줬다면 승자에겐 '밭떼기'로 줬을 것"이라고 반격했다.

불법대선자금을 둘러싼 싸움이 차떼기 대 밭떼기 공방으로 점화되면서 정국은 극한 대결로 치달았다

◇고해성사=최근 천주교측에서 정치권이 불법대선자금 수사와 관련해 '고해성사'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용어의 본질을 왜곡하는 신성모독 행위"라며 자제를 당부했다.

고해성사란 '가톨릭 신자가 알게 모르게 범한 죄를 성찰.통회.고백.보속 등의 절차를 통해 용서받는 성스러운 행사를 의미하는 만큼 진흙밭인 정치권에서 사용되는 것을 꺼린다'는 표현도 덧붙였다.

사실 노 대통령과 정치지도자들의 릴레이식 기자회견은 가관이었다.

이 전 총재가 15일 '감옥행'도 불사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갖자 노 대통령이 바통을 받아 16일 회견을 자청했다.

그러자 최 대표도 17일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이들은 일제히 "국민에 죄송하다.

검찰의 성역없는 조사 후 책임질 것은 책임지겠다"고 고해를 약속했으나 고해의 핵심인 불법 자금의 모금 규모와 이것을 어디에 썼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다만 상대방의 고백을 요구하면서 '네가 더 검다'는 식의 네거티브 전략을 사용하기 일쑤였다.

노 대통령은 불법 모금액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이 안될 것"이라면서도 구체적인 내역을 밝히지 않은 점과 이 전 총재가 "내가 불법 모금을 지시했으며 감옥에라도 가겠다"면서도 구체적 사용처에 대해선 입을 닫은 점은 과연 진정한 고해 의지가 있는지를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나라당 최 대표도 역시 지난 11일 5일간의 단식요양을 끝내고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상황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밝히겠다"고 했으나 "'자수'한 불법 모금 규모는 검찰 수사에서 이미 드러난 사실을 그대로 옮겼다"면서 지금까지 어디에 어떻게 썼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김수환(金壽煥) 추기경도 불법 대선자금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뜻의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김 추기경은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타인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정치권 풍토를 바꿔야 한다"며 "그 허물이 용서를 받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이런 과정 없이 정치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측근비리=불법대선자금으로 궁지에 몰린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측근비리 의혹을 줄기차게 제기하며 반전을 꾀하고 있다.

이미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 최도술(崔導術), 이광재(李光宰), 양길승(梁吉承) 관련 권력형 비리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검법'이 발효, 김진흥(金鎭興) 특검이 출범했다.

김 특검은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및 이영로(李永魯) 전 대통령 후보 부산지역 후원회장 관련 불법자금모금 및 수수의혹사건 △썬앤문 그룹측이 대선을 전후해 이광재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등 노 후보측에 제공한 95억원의 불법자금 의혹사건과 △청주 키스나이트클럽 소유주 이원호가 양길승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 등에게 제공한 불법자금 수수 의혹사건 등을 수사대상으로 꼽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썬앤문 그룹의 감세청탁 로비 의혹, 장수천을 둘러싼 거래 등을 집중추궁하며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노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직전 썬앤문 그룹 문병욱(文柄旭) 회장을 부산에서 만난 데 이어 취임 후 청와대에서 회동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노 대통령의 개입 의혹까지 끄집어냈다.

한마디로 노 대통령이 이번 사건의 몸통이라는 것이다.

민주당도 노 대통령이 문 회장을 청와대에 초청한 이유를 추궁하면서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 밝힐 것을 요구한 상태.

하지만 지금까지 검찰에서 밝힌 불법대선자금 모금과 관련한 측근비리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노 캠프측에 돈을 전달한 기업은 썬앤문 그룹이 유일하며, 돈의 규모도 이 전 실장이 대선직전 썬앤문에서 받았다는 1억500만원과 안희정(安熙正)씨가 수십억원을 수수했다는 내용이 전부다.

게다가 23일 노 대통령의 측근인 강금원(姜錦遠) 창신섬유 회장에 이어 썬앤문 문 회장마저 '개인비리' 혐의로 구속되자 검찰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홍준표(洪準杓) 전략기획위원장은 "권력비리가 개인비리로, 뇌물수사가 용돈수사로 은폐되고 있다"며 "결국 검찰은 특검에 대비해서 수사하는 척 쇼를 하고 있다"고 검찰을 겨냥했다.

특히 축소.은폐 수사를 이유로 들어 주임 검사 교체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10분의 1 발언="아내 몰래 숨긴 비자금이 월급의 10%를 넘으면 이혼하겠다", "여종업원의 미모가 상위 10% 수준이 안 되면 술값을 받지 않겠다"

노 대통령이 지난 14일 "불법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걸고 정계 은퇴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이후 이른바 '10%'를 패러디한 새로운 사회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그만큼 대통령 발언에 대한 파장이 컸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 같은 10분의 1발언은 자연히 정치권에도 논쟁의 불씨로 자리매김했다.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불법정치자금은 많이 써야 죄가 되고 적게 쓰면 아무렇지도 않느냐"며 들고 나온 '원죄론'에 시달렸고 한나라당은 불법자금이 10%를 넘나, 안 넘나 검찰의 조사결과 발표를 예의주시하는 상황에 놓였다.

결국 양쪽 다 끝이 보이지 않는 소모전을 벌이며 초긴장 정국을 스스로 유도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19일에는 "우리가 (선관위에) 신고한 금액은 260억∼280억원 정도인데 합법 불법 다 털어도 350억원 내지 400억원 미만"이라고 발언, 전체 불법자금의 규모를 대략적으로 제시했다.

당시 노 후보측이 올 초 선관위에 신고한 선거비용의 정확한 액수는 274억1천만원. 따라서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불법 자금이 76억원에서 124억원 가량 될 수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했다.

민주당은 즉각 "노 대통령이 불법자금 규모를 시인한 것"이라고 공세를 폈고 이에 대해 청와대는 "통상적인 정당 활동비 등을 감안한 것이며 아무리 더하고 더해도 350억원에서 400억원이 넘지 않는다는 얘기"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불법으로 유입된 자금과 불법으로 지출된 자금 모두를 불법자금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최근 영수증 처리가 안된 특별당비 24억원과 안희정씨와 최도술 전 비서관 등이 받은 자금 등 총 144억9천만원을 불법자금으로 규정하기 위해 몰아붙이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노 후보측의 불법대선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이 넘느냐는 수치상의 비교는 일단 자제하고 검찰 수사를 관망하겠다는 기본입장이다.

'10분의 1'이라는 노 대통령의 자의적 기준에 자칫 휘말릴 경우 노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에 대한 국민의 비판 여론이 한나라당으로 향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한나라당의 불법자금이 지금보다 더 밝혀지는 것에 대한 우려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김태완기자 kimchi@imaeil.com

박상전기자 mikypar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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