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광해군만큼 극적인 과정을 거쳐 즉위했거나, 권력의 정점에서 극적으로 퇴장당한 군주를 찾기는 쉽지 않다.
선조 7년(1575) 후궁 공빈 김씨 소생으로 태어난 광해군은 총명했지만 친형 임해군과 수많은 이복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왕이 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임진왜란은 위기이자 기회였다.
재위 25년(1592) 4월 28일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의 탄금대에서 참패하고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도성(都城)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29일 저녁 선조는 신립의 동생 신잡의 건의에 따라 광해군을 왕세자로 결정하고 다음날 새벽 서울을 떠났다.
전란 속에 얻은 세자의 지위는 고달픈 것이어서 광해군은 분조(分朝:국난 때 조정을 둘러 나눠 대처하는 것)를 이끌고 왜군이 득실대는 전국을 순회해야 했다.
노숙도 마다않았던 고된 행군으로 병을 얻기도 했지만 대신 선조의 후사 자리는 굳어져갔다.
임해군이 근왕병 모집을 위해 함경도로 갔다가 조선 아전 국경인(鞠景仁)에게 포박되어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진 것과 비교해보면 광해군의 성취는 더욱 빛나는 것이었다.
북인에게도 임진왜란은 기회였다.
북인의 종주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평생 벼슬을 거부하고 지리산 기슭 덕산(德山)의 산천재(山天齋)에 살면서 후학을 길렀다.
조식은 단성현감 사직 상소에서 절대 금기였던 대비(大妃) 문정왕후(文貞王后)까지도 거침없이 비판할 정도로 현실비판 의식이 높았는데, 그의 이런 처신은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칼을 찬 처사'였던 조식의 문무겸전의 자세는 경상우도의 학풍이 되어 그 문하에서 정인홍(鄭仁弘).곽재우(郭再祐).조종도(趙宗道)같은 쟁쟁한 의병장들이 대거 배출되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정치를 멀리하다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대거 의병을 일으킨 북인들은 명분을 확실히 장악했고, 선조는 북인의 이런 선명성을 몽진(蒙塵)으로 추락한 왕권강화에 이용하기 위해 정권을 맡겼다.
이렇게 광해군과 북인은 임란 덕분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역전, 또 역전된 광해군의 운명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선조는 광해군의 부상에 신경이 쓰였다.
임란 때 반란을 일으킨 송유진이 국문에서 '동궁(東宮:광해군)을 세우면 백성들에게 유리할 것이다'라고 진술한 것이나, 명나라 신종(神宗)이 1595년 윤근수(尹根壽)에게 준 국서에서 "황제가 조선국 광해군 혼(光海君 琿)에게 칙유(勅諭)한다.
… 그대는 마땅히 분발하여 마음을 다해 부왕(父王)의 실패를 만회하여… ('선조실록'28년 3월 27일)"라고 '부왕의 실패'를 거론한 국서를 광해군에게 직접 준 것은 선조의 신경을 극도로 예민하게 했다.
위기감을 느낀 선조는 임란 와중에만 15번이나 양위 소동을 벌여 광해군과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노골적으로 광해군을 견제했다.
1601년 예조에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광해군 승인을 요구하자고 청하자 "왕비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는데도 왕비 책봉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고 왕세자 책봉만 주장하는가"라고 꾸짖은 것은 그런 대표적인 예였다.
그러면서 선조는 이듬해(1602) 서른두 살 아래의 인목왕후와 재혼해 4년 후(1606) 영창대군을 낳았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이 둘로 갈라졌다.
선조의 마음이 광해군에게서 멀어졌다고 생각한 신하들이 강보에 싸인 영창대군에게 모이기 시작했다.
집권 북인들도 마찬가지로 광해군과 영창대군 지지세력으로 갈라졌다.
광해군 지지세력은 정인홍이 중심인 대북(大北)이었고, 영창대군 지지세력은 영의정 유영경이 중심인 소북(小北)이었다.
양자 사이에서 선조가 유영경의 손을 들어주면서 광해군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되었다.
이때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은 "전하께서는 빨리 유영경이 동궁의 지위를 불안하게 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 한 죄를 거론하시어 상형(常刑)을 바르게 하소서 ('선조실록'41년 1월1일)"라는 상소를 올려 국면전환을 시도했으나 그 결과는 정인홍의 귀양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달 선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은 다시 극적으로 역전되었다.
*광해군의 즉위와 연립정권
영의정 유영경과 병조판서 박승종 등 소북에서 반발했지만 이미 16년이나 세자 노릇을 한 34세의 광해군을 제쳐두고 3세의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잇게 한다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인 발상이었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왕후보다도 9세나 많았던 것이다.
광해군은 이렇게 조직적인 반대를 극복하고 즉위했지만 즉위 초 코드인사를 고집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소북 영수 유영경은 처벌했지만 유희분(광해군의 처남), 박승종, 최유원 등 다른 소북은 중용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광해군을 지지한 대북의 정인홍, 이이첨 등이 불만을 가질 정도였다.
또한 광해군 즉위 초의 실권은 북인들이 갖고 있었지만 광해군은 영의정에 남인 이원익을 임명하고, 서인 이항복과 남인 이덕형을 중용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전 당파를 아우르는 연립정권으로 정권의 안정을 꾀했다.
이런 토대 위에서 광해군은 전란으로 황폐화된 나라의 재건에 나섰다.
즉위 원년 경기도에 시범실시한 대동법은 대표적인 민생법안이었다.
대토지 소유자는 많이 내고, 빈자는 적게 내는 대동법에 대한 지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광해군과 북인, 그리고 남인 이원익은 개혁을 강행했다.
허준의 '동의보감'도 전란 후 창궐하는 전염병에 대처하기 위한 광해군의 강력한 의지로 편찬된 책이었다.
광해군은 문화재건에도 나서 적상산(赤裳山) 사고(史庫)를 설치해 '왕조실록' 등 중요한 전적(典籍)들을 보존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국조보감' 등을 다시 편찬했다.
또한 재위 3년(1611)에는 양전사업을 실시해 전란으로 황폐해진 농지를 재정비하고 국가 재원을 확보했다.
이런 조치들로 조선은 점차 전란의 상처를 씻고 안정을 찾아갔다.
*광해군과 대북의 실책
그러나 광해군이 인위적인 왕권강화에 집착하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종묘를 중건하고 창덕궁,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등 궁궐을 중건하거나 새로 지었으며, '용비어천가'를 복간하고, 생모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라고 추숭하는 것으로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또한 광해군은 신료들로부터 여섯 차례나 존호를 받았는데 '체천흥운준덕…(體天興運俊德…)'으로 시작하는 존호는 48자에 달하는 역사상 최장의 것이었으나 그만큼 민생은 멀어졌다.
대북도 마찬가지였다.
정인홍은 집권의 정당성을 학문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스승 조식을 문묘(文廟:공자를 모신 사당)에 종사(從祀:공자와 함께 제사지냄)하려다가 실패하자 이언적(李彦迪:서인)과 이황(남인의 종주)을 비판하고 나서 서인과 남인 모두를 반대당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광해군 5년(1613) '칠서(七庶)의 옥(獄)'을 빌미로 김제남(金悌男:인목대비의 부친)과 영창대군을 사형시키고 나아가 재위 10년(1618)에는 인목대비가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명분론을 내세워 폐모(廢母)시키는 무리수를 두었다.
폐모론은 정인홍.이이첨.허균 등 대북 일부만 찬성했을 뿐 서인.남인은 물론 소북의 남이공과 기자헌 같은 대북까지도 반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대북은 이를 일당독재구축의 계기로 삼아 폐모에 반대하는 다른 모든 정파를 내쫓고 정권을 독차지했다.
'연려실기술'이 '서인은 이를 갈고 남인은 원망하며, 소북이 비웃는다'고 적는 고립된 상황에서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이복형제와 그 외조부를 죽이고, 특히 계모를 폐서인한 광해군과 대북의 과잉처사는 효를 충보다 우선시하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정권을 정통성 시비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쿠데타의 명분을 주었다.
*인조반정과 북인의 몰락
광해군 15년(1623) 3월 김류(金流玉).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이괄(李适) 등의 서인들은 선조의 서손(庶孫) 능양군(綾陽君:인조)을 추대하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서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해 폐모론에 반대하다 쫓겨난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추대해 서인.남인연합정권을 수립했다.
그리고 북인 숙청에 나섰다.
정인홍.이이첨 등 대북은 목이 잘리고 박승종 등 소북은 자결했으며, 뒤이은 이괄의 난 때는 수십 명의 북인들을 한꺼번에 처형했다
그 결과 북인 자체가 정계에서 사라졌다.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는 위호(位號)를 회복한 반면 광해군의 모친은 공빈으로 강등되어 종묘에서 쫓겨났고, 48자에 달하는 존호를 받았던 광해군은 '혼군(渾君)'이란 비아냥의 대상이 되었다.
북인은 조선의 여러 정당 중 가장 실질적인 정당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정당이었던 북인은 역설적으로 명분론에 집착해 상대당을 축출하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끝내는 정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임란과정에서 집권한 광해군과 북인의 역사적 과제는 성리학적 명분론에서 벗어나 실질을 숭상하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 길이 광해군과 북인이 함께 살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과 북인은 폐모론 같은 소모적인 명분론을 화두로 삼아 독존을 추구한 결과 인조반정이란 역풍을 맞고 정계에서 사라졌다.
명분론과 현실론이 늘상 부딪치는 개혁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광해군과 북인의 정치행적은 개혁의 명분과 현실, 그리고 정치의 작용과 반작용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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