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상인터뷰-가야정복 신라장군 이사부

'철의 나라' 가야가 신라 장군 이사부의 말발굽에 무너졌다.

532년 금관가야의 멸망에 이어 562년 대가야마저 무너짐으로써 고구려.백제.신라가 건국될 무렵 낙동강 유역에 등장했던 6가야가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다.

가야 정복전쟁을 지휘한 신라장군 이사부를 만났다.

▲한때 신라나 백제에 맞설 만큼 강력했던 가야가 그처럼 쉽게 무너진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우선 우리 군의 전략과 전술, 장비가 대가야 군보다 우수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승부가 반드시 전장에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야는 아시다시피 '철의 왕국'이며 비옥한 농토를 가진 국가입니다.

그러나 중앙집권적인 제도가 미흡했습니다.

특히 군대가 중앙의 통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가야는 고급 철제 갑주와 무기로 무장한 군대가 있었지만 고을 단위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국가 단위의 대군 앞에서 고을 단위의 소규모 군대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을을 하나씩 하나씩 점령하는 방식으로 대가야를 점령했습니다.

▷신라의 법령은 어떠하며 군대는 어떤 방식으로 움직입니까.

-우리 신라는 지증왕 때 이미 비인간적인 순장제도를 금지했습니다.

대가야는 멸망하기 직전까지 순장제도를 고집하고 있었다지요. 우리는 또 왕호를 사용하고 국호를 신라로 고쳐 국가 단위의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가야의 고을 단위 통치와 다른 점입니다.

법흥왕께서는 또 병부를 두어 대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편성했습니다.

귀족회의를 제도화해 나라의 힘을 하나로 모았고 불교를 공인해 국민들의 정신적인 통일도 이룩했고요. 이 모든 법적 제도적 지원과 현 진흥왕의 진취적인 생각이 오늘 가야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끈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신라의 우산국(울릉도) 정벌은 장군의 지략이 빛났다고 들었습니다.

-동해의 우산국은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공연히 피를 흘릴 필요가 없었지요. 대규모 함대와 나무로 만든 사자로 겁을 주어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싸워봐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림으로써 양쪽 모두 피를 흘리지 않고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고 봅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셨는데, 지난번 관산성(충북옥천 554) 전투에서 백제와 가야 연합군을 대파한 후 포로 1만여 명을 모두 죽인 것으로 압니다.

-글쎄요. 포로가 정확히 1만여 명이 되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많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당시엔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포로를 먹일 수 없었습니다.

먹일 수 없으니 일을 시킬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풀어주면 그들은 다시 우리 백성들의 목에 칼을 겨누었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비정함이 아니라 전쟁의 비정함이라 이해해 주십시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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