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의 개혁-(14)조선 숙종 줄타기 권력강화

*신권이 강한 나라

선진국형 정치와 후진국형 정치의 큰 차이 중 하나는 예측성 여부이다.

선진국형 정치는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한 반면 후진국형은 불가능하다.

내일, 혹은 일주일 후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사회가 발전할 수는 없다.

조선에서 불가측성(不可測性)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숙종 때였는데, 그가 이를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조선 사회가 받은 상처는 크고 깊었다.

숙종은 즉위 당시 14세에 불과했는데 그것도 제2차 예송논쟁으로 정권이 바뀌는 와중이었다.

어린 국왕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강한 신권(臣權)을 제어하는 것이었다.

예송논쟁 자체가 신권이 강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국왕이 승하했는데 신하들이 3년복설과 1년복설을 다투고, 왕비가 세상을 떴는데 1년복설과 9개월복설을 다툰다는 자체가 강한 신권(臣權)의 반영이었다.

국왕에게 장남이냐 차남이냐, 적자냐 서자냐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왕권이 약하다는 방증이었다.

부왕 효종의 죽음으로 시작된 1차 예송논쟁 때 서인들의 기세에 밀려 자의대비 조씨의 복제를 1년복으로 의정했던 현종은 15년 후 모친 효종비 장씨의 죽음으로 재연된 2차 예송논쟁 때 이를 뒤집었다.

나아가 현종은 그 책임을 물어 집권 서인들을 내쫓고 남인들에게 정권을 주기로 결심했다.

인조반정 이래 만년 야당이던 남인들이 비로소 정권을 잡게 된 찰나였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현종이 급서하면서 어린 숙종이 즉위했던 것이다.

*당파 영수가 더 높다니

어린 숙종이 이런 난국을 헤쳐가기에는 누가 보더라도 무리였다.

특히 거대정당 서인은 국왕보다 당수 송시열(宋時烈)을 더 높였다.

숙종은 즉위 초 이런 거대정당에 맞서 왕권을 강화해야 했다.

그 첫 번째 시험대가 대제학 이단하(李端夏)가 지은 현종의 행장(行狀)이었다.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이단하는 현종이 예송논쟁에서 서인들의 설을 물리친 것을 '복제를 바로 다스렸다(服制釐正)'라고 애매하게 기록했다.

숙종의 질책을 받고서야 "송시열이 예론을 이끌었다(所引禮)"라고 당사자의 이름을 적었지만 내용은 역시 애매한 것이었다.

숙종은 '예론을 이끌었다(所引禮)'를 '예론을 잘못 이끌었다(誤引禮:오인례)'라고 고치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했고, 할 수 없이 그렇게 고친 이단하는 '엄한 하교 때문에 할 수 없이 오(誤)자를 썼다'라고 변명했다.

숙종이 "너는 스승만 알고 임금은 알지 못하는구나"라며 그를 파면시킴으로써 자신이 만만한 인물이 아니란 사실을 알릴 수 있었지만 이로써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약한 왕권과 강한 신권은 정치 지형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숙종 때 주청사로 북경에 갔던 정재숭(鄭載嵩)의 '장계별단(狀啓別單)'에 청나라 예부시랑(禮部侍郞) 오합(敖哈)이 청의 성조(聖祖)에게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여 만약 우리 조정에서 보호하지 않는다면 몇 번이나 왕위 찬탈이 있을지 알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처럼 조선은 구조적으로 왕권보다 신권이 강한 나라였다.

숙종에게 왕권강화는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숙종이 왕권강화를 치세 제1의 목적으로 삼은 것은 당연해 보였다.

*잇단 정권교체와 정치보복

문제는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 정권교체였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각 당파 사이에 극단적인 증오를 부추겼다.

제2차 예송논쟁 와중에서 비로소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서인들에게 증오의 칼날을 휘둘렀다.

남인들은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 간 송시열의 죄를 종묘에 고묘(告廟)하자고 주장했는데, 인신(人臣)으로서 고묘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는 송시열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실각한 서인들에게 향했던 남인들의 증오는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정권이 붕괴하면서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남인 영상 허적(許積)이 연시연(延諡宴) 때 비를 막기 위해 궁중의 기름천막(油幄)을 마음대로 가져다 쓴 사소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남인정권이 붕괴되고 서인들이 정권을 잡은 것이다.

서인들은 몇 년 전 자신들이 받았던 증오를 몇 배로 갚아주었다.

허적과 그 서자 허견(許堅), 남인 논객 윤휴가 사형당했으며 복선군.복창군 등의 종친들을 비롯해 100여명이 화를 입었다.

*미인계까지 등장

이렇게 되자 각 정파는 정권획득을 지고(至高)의 가치로 삼았고 목적이 수단을 지배했다.

미인계까지 횡행했는데 장옥정(장희빈)이 바로 남인들이 의도적으로 숙종에게 접근시킨 여인이었다.

그런 장옥정이 숙종 14년(1688) 왕자를 낳은 것은 남인 미인계의 승리였다.

재위 14년 만에 낳은 왕자를 숙종은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해 후사로 삼으려 했으나 갓난 왕자를 남인이라고 본 서인들이 반발했다.

숙종은 원자 정호를 강행하고 이를 종묘에 고묘함으로써 논란을 잠재우려 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종묘 고묘까지 끝난 이 사안에 대해서 정면반발하는 상소를 올렸고 서인 정권 아래에서는 원자의 장래가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한 숙종은 전격적으로 서인을 내쫓고 남인들을 등용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1689)을 단행했다.

다시 칼자루를 잡은 남인들은 경신환국의 빚을 다시 서인에게 돌려주었다.

송시열과 영의정 김수항, 그리고 숙종의 고모 숙안공주의 외아들 홍치상(洪致祥)이 사형 당했고, 나아가 인현왕후 민씨가 쫓겨나고 희빈 장씨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미인계로 쫓겨난 서인들도 미인계로 대응했다.

새로 숙종의 총애를 얻기 시작한 숙빈 최씨(영조의 모친)가 그 대상이었다.

이를 눈치 챈 남인정권은 숙종 20년(1694) 김춘택 등 서인들을 역모로 고변해 타격을 가하려 했으나 숙빈 최씨를 이용한 미인계가 성공하면서 정국은 하루 아침에 반전되었는데, 이것이 서인들이 정권을 잡는 갑술환국(1694)이었다.

서인 영수 민진원은 "단암만록(丹巖漫錄)"에서 "갑술환국 때 세상에서는 대개 김춘택이 봉보부인(숙종의 유모)을 통해 숙빈 최씨에게 계책을 세워 남인의 정상을 주상에게 자세히 알려주어 대처분(大處分)이 있었다"라고 미인계의 실상을 솔직히 고백하기도 했다.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영수 민암(閔黑音)을 비롯해 수많은 남인들을 사형시켰다.

심지어 전 참판 조사기(趙嗣基)는 과거 송시열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사형 당했는데, 그야말로 집권이 정의가 되고 실권이 불의가 되는 상황이었다.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쫓겨났던 인현왕후 민씨가 다시 복위되고 왕비 장씨는 후궁으로 전락했다.

*왕권강화의 결실 민생개혁

전격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용사출척권(用捨黜陟權)을 반복해서 행사하면서 숙종의 왕권은 강화되었다.

각 당파는 서로 증오했지만 숙종에게는 충성경쟁하기에 바빴다.

재위 39년(1713)에 신하들은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존호(尊號)를 올려 바치겠다고 간청했는데, 숙종이 거절하자 대신은 물론 종친들까지 나서서 존호를 받으라고 간청할 정도로 왕권은 하늘을 찔렀다.

숙종은 못 이기는 척 '현의 광륜 예성 영렬(顯義光倫睿聖英烈)'이란 존호를 받아 태종 이래 최고의 왕권을 구가했다.

숙종은 강력한 왕권으로 민생에 상당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재위 34년(1708년) 황해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대동법을 전국 단일법으로 만들었으며, 재위 29년(1703)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하고 이듬해 군포균역절목(軍布均役節目)을 반포해 1필에서 3, 4필까지 고르지 않던 군포를 2필로 단일화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임진왜란 이래 지지부진하던 양전사업(量田事業)을 사실상 완결지은 인물도 숙종이었다.

숙종은 경제발전에도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농업생산력 발달에 힘입어 상업의 수요가 늘어났으나 이를 촉진시킬 유통수단이 부족하자 여섯 차례나 주전(鑄錢)을 발행해 상평통보(常平通寶)를 통용시킨 인물도 숙종이었다.

숙종 때의 이러한 경제시책은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경제업적 뒤엎은 정치파행

그러나 이런 경제적 업적들은 파행적 정치운용으로 빛이 바랬다.

정권이 한번 바뀔 때마다 100여명씩 죽어나간 정치상황은 다른 모든 업적들을 뒤엎고도 남았다.

숙종은 당파 사이의 증오를 부추기며 왕권강화라는 열매만 챙겼을 뿐 사회통합을 위한 아무런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갑술환국으로 재집권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려 다투었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그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 누구도 일주일 후의 일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당장 대통령 자신의 운명부터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다가오는 총선결과도 알 수 없으며, 그 결과에 따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도 알 수 없다.

정치의 이런 불가측성은 당연히 경제의 발목을 잡고, 사회 구성원 서로가 불신하면서 회색안개가 가득차 있다.

이런 회색 안개를 걷어내고 예측가능한 정치구조를 구축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우리 정치가 가장 시급히 수행해야 할 개혁일 것이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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