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앞마당은 여행자들의 짐을 싣는 지프들로 분주하다.
어제 만나 인사를 나누었던 티베트 운전기사 팅로는 먼 길을 떠나는 사람답지 않게 아무런 짐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중국동포 가이드 안씨는 기름때로 얼룩이 진 그의 머리와 아무런 짐도 없이 먼 길을 가는 그를 가리키며 티베트 사람들의 게으름에 혀를 찬다.
하지만 척박한 기후 속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살아가는 방법을 게으름으로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여행자들 중에서도 며칠 씩 머리를 감지 않거나 목욕을 오랫동안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한데도 결코 그들을 게으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늘 떠남을 준비해야 하는 여행자의 짐조차 가볍거늘 하물며 나라를 잃고 떠도는 그의 짐이 가벼운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 싶어 안씨의 말이 오히려 거슬린다.
브리쿠티 공주를 따라 나서는 길이다.
그녀가 네팔에서 티베트로 시집왔다는 길, '우정공로(友情公路· Friendship Highway)'는 그 이름이 뜻하듯 네팔과 티베트의 오랜 관계를 보여주는 티베트와 네팔을 잇는 길이다.
장장 920km, 히말라야를 가르는 이 길을 지나오면서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얼굴조차 모르는 남편, 척박한 땅에서 맞닥뜨리며 살아야 될 사람들, 온갖 회한 속에서 그녀는 오로지 자신을 지켜 줄 불심에 기대며 그 먼 길을 지우지는 않았을까?
그러다 아들이 죽으면 며느리를 부인으로 맞는 관습 속에서 며느리였던 문성공주가 남편의 또 다른 부인이 되는 세월을 만났을 때 그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혹시 그녀의 불심은 이런 고통의 시간 속에서 더욱 깊어지지 않았을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세속적인 의문은 속절없고 부질없다.
하지만 서북공정이 티베트의 불교 중흥을 마치 문성공주만의 공로인양 드라마까지 만들어 내는 현실에서, 티베트를 불국토를 만들려 했던 한 여자, 브리쿠티 공주는 더더욱 살갑고, 그 이름 끝에 아스라한 우정공로는 그리움처럼 다가온다.
"저기가 사형장 입니다.
" 라사를 막 벗어날 무렵, 가이드 안씨가 침묵을 깬다.
황량한 산을 배경으로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사형장은 음산하다 못해 을씨년스럽다.
가끔 TV에서 보이는 중국의 즉결처분 현장이다.
중국은 티베트를 침공한 후 이주정책으로 티베트인들을 분산시켰고 그 결과 현재 티베트에 거주하는 티베트인들은 20%에 불과하다.
결국 사형장까지 만들어야 유지되는 사회를 만든 중국의 죄는 그 어떠한 것보다 큰데도 소위 그들이 사회악이라 말하는 작은 죄를 벌할 수 있는 권리가 그들에게 과연 있기나 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아무 것도 지켜줄 수 없는 그 사형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프는 녹슨 가시철망을 스치듯 지난다.
1962년산 지프는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에도 아랑곳없이 벌써 한 시간을 넘게 캄바라 고개(Kambala· 4,794m)를 오르고 있다.
황량한 돌무더기 언덕 사이로 푸른빛이 감도는가 싶더니 만년설을 머리에 인 히말라야 봉우리들을 병풍처럼 친 호수가 나타난다.
'노한 신들의 안식처'라는 뜻의 암드록쵸(Yamdrok-tso·羊卓擁錯· 4,488m) 다.
약 670㎢의 면적을 지닌 티베트의 가장 큰 호수 중 하나로, 성스러운 호수(聖湖)라 하여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곳이다.
푸른 보석(藍色寶石)이라고 부르는 이름처럼 호수를 따라 야크가 방목되고 있다.
붉은 수술로 장식한 야크는 그저 그림처럼 서 있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은 탓에 움직일 이유가 없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뿔에 달린 작은 종이, 가끔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한 티베트를 닮아 있다.
폐허가 된 사원 앞에서 홀로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사람들, 천막 하나에 몸을 의지한 도로 공사장의 인부들, 모든 것들이 더디게 흘러간다.
시간은 그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순간일 뿐이다.
해발 5,220m의 가쵸 라(gyatsola pass ·加借拉山) 고개에서 잠시 차를 멈추자, 아이들이 달려든다
아이들은 추위에 발갛게 튼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빈 생수 병을 달라고 조른다.
목걸이 볼펜을 하나 주자 사용법을 몰라 어쩔 줄 모르고, 언덕 위에 앉아 담배를 피던 어른들은 빙긋이 웃는다.
아이들은 "아빠"를 부르며 뛰어간다.
달라이라마 14세가 말했듯이 한국인과 티베트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아 있다.
"엄마, 아빠"라는 말도 똑 같고 실제로 생긴 모습은 너무나 비슷해서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마을 인근 도로 중간에 상자 같은 것이 놓여 있다.
흉사가 있는 집안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한다.
자동차들이 지나가면서 부수어 흉사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다.
우리네 어린 시절도 그랬다.
눈병이 나면 눈썹을 뽑아 돌에 붙여 몰래 길에 놓아두고서 지나가는 이가 발로 차 눈병이 달아나기를 기원했던 기억이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티베트인과 한국인은 전생에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간체((江孜)라는 도시에 도착한다.
오후 6시가 넘어 사원들은 문을 닫았고 영국군의 침략에 맞서 백성들이 항전을 벌이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최후를 맞았다는 종산포대(宗山砲臺)란 요새만이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가야할 길이 멀었던지 운전기사와 가이드는 서두르고 힘을 잃은 햇볕 사이로 나이든 지프는 안간힘을 쓰고 있다.
거의 해거름에 닿아서야 티베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시가체(日喀則· 3,900m)에 도착한다.
시가체는 판첸 라마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판첸 라마는 제5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 붙여진 명칭으로 자신의 수제자에게 '위대한 철학자'라는 뜻의 호칭을 선사한 것이다.
이 후 아미타불의 환생으로 증명되어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세속적으로는 정치적으로 결합하고 종교적으로는 서로 존중하는 관계로 존재해 왔다.
하지만 현재의 판첸 라마는 티베트인들이 제도적 환생을 통해 찾아 낸 11대 판첸 라마를 중국으로 납치하고 감금한 후 중국 측이 내세운 가짜다.
어린 소년을 베이징에 가두고 중국식 교육을 받고 중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인물을 옹립하여 티베트를 끊임없이 분열시키는 중국은 더 이상 사회주의의 이념을 말할 자격이 없다.
중화인민민주주의는 이미 부끄러운 중화제국주의의 낡은 껍질이 되었을 뿐이다.
시가체는 이렇게 우울한 얼굴로 여행자를 맞는다.
숙소는 새로 지어 비교적 깨끗한데다 라사에서 만났던 한국 친구들이 머물고 있어 마음이 편하다.
그들은 이미 일년 째 동남아시아를 여행하고 있는 친구들이다.
"여행은 서로를 이해하고 삶을 생각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여행을 통해 삶에 대한 이해와 사람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고 말하는 두 친구는 대학을 갓 졸업한 남녀로 야무지고 단단하다.
여행에서 만나는 젊은 친구들에게서 희망을 만나게 되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 때문이다.
특히 두 친구의 사람에 대한 애정은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니라 나이답지 않은 깊이가 있어 부럽기까지 하다.
12시간을 넘게 차에 시달린 탓에 일찍 침대에 누웠지만 쉽게 잠들지 못한다.
라사를 떠나면서 오히려 중국의 티베트 말살 정책이 노골화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 점점 힘들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러 나간 가이드와 운전기사는 밤이 깊어 가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옆방에서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다.
이른 아침, 새벽에 들어온 가이드를 깨워 '복(福), 길상(吉祥)의 모임'이란 뜻의 타쉴훈포 사원으로 향한다.
사원으로 걸어가는 동안 내내 가이드 안씨는 함께 술을 마셨던 운전기사의 게으름에 투덜거리다가 결국은 티베트의 독립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서 편히 살면서 티베트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어요."
그 역시 조선족으로 박해받는 입장이거늘 어찌 이럴까 싶었지만 동포라는 생각에 묵묵히 듣다가 궁극에는 화를 내고 말았다.
달라이 라마의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미 티베트를 향하는 여행자들의 깊은 존경을 받고 있음이 틀림없는데도 중국의 서북공정은 어리석게도 여행자들을 상대로 하는 가이드에게도 티베트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
매표소에 선 공안은 여행자들에게 일일이 여행허가서를 요구하고 가이드는 담배를 권하며 행여 트집이라도 잡힐까 싶어 안절부절못한다.
달라이 라마 1세가 1447년에 창건하여 이미 5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고 사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느 사찰보다도 잘 단장되어 있지만 휑한 바람이 부는 감옥이다.
티베트인들은 여전히 오체투지로 나라를 잃은 슬픔을 달래고 있지만 여행자의 마음은 씁쓸하기만 하다.
전태흥(자유기고가)
사진설명 : 간체의 종산포대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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