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산이 겨우내 막혔던 숨통 틔우려고 세상을 향해 화해의 손짓을 하고 있다. 곧 태어날 꽃다지, 냉이, 민들레 등 봄의 새싹들 키우느라 매일 다르게 배가 불러오는 것 같다.
을유년 설날을 지나 첫 보름달이 무르익고 있다. 바닷물이 차오르는 정월 대보름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설날은 조상과 어른께 세배 드리는 날이었지만, 농경사회에서는 이 대보름이 큰 명절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싶다.
남보다 더 이른 새벽 오곡잡곡밥과 나물로 소지를 사르며 한 해의 무탈함과 후손들이 남에게 꽃으로 잎으로 보이도록 소원을 빌었다. 귀밝이술을 마시고 잇몸병을 없애기 위해 부럼으로 여문 강정을 깨물었고 종일 풍물놀이로 풍년을 기원하고 토정비결로 그 해의 길흉화복을 점치기도 했었다.
상주지방에서는 동네 우물물을 제일 빨리 떠 오는 며느리가 가장 살림 잘 산다고 칭찬을 받았다니 서로 밤샘으로 기다렸을 그 광경이 눈에 선하다. 특히 시골 과수원에서 자란 나는 첫술에 김을 싸서 먹고 꿩알을 줍는다거나 까마귀나 까치들을 쫓아야 하기에 '후여 후여'하며 아침 일찍 사과나무 밑을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그 해의 첫 보름인 대보름은 대망(大望)이라 하여 달빛의 밝고 흐림과 위치 등으로 그 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쳤다고 하는데 '불놀이'란 시로 유명한 주요한 시인의 '봄달잡이'란 시 부분을 잠시 읽어보면, '봄날에 달을 잡으러/ 푸른 그림자를 밟으며 갔더니/ 바람만 언덕에 풀을 스치고/ 달은 물을 건너가고요.' 달과 봄은 다 같은 상징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정월 대보름은 생명력의 다산(多産)과 풍년을 기원하고 추구하는 날이었던 것 같다.
달의 음기를 마시며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어보기도 했지만 음력 정월 첫 쥐날에 쥐를 쫓는다하여 논둑, 밭둑에 쥐불을 놓기도 했었다. 특히 이날은 필자의 친정어머니 생신인지라 온 가족이 연례행사로 밭둑의 황금빛 잔디를 태우느라 눈썹과 치맛자락을 태우기 일쑤였다.
쥐불놀이 뒤엔 딸 넷이 부엌으로 외양간으로 돌아다니며 지신을 밟았다. 큰 언니가 '지신을 밟자 성주야'하면 우린 '쾌지나 칭칭 나네'를 멋모르고 외쳐대곤 했다. 그렇게 달빛을 웃음으로 보쌈하여 싸먹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그 어머니 지금 아흔을 훌쩍 넘기시고도 아직도 자식들을 위해 추어탕을 끓여놓고 기다리시는 걸 보면, 그때 그 시절 모두 부지런히 달님께 기도했던 덕이 아닐까.
이처럼 풍요로운 봄의 출산을 기다리는 간절하고도 적극적인 행위예술이 우리들 삶과 시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는데,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열고 소통을 위한 움을 틔우려는 염원의 한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계 평화라는 미명으로 또는 갑작스런 해일로, 정치적 경제적인 한파로 아직 피 흘리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번 대보름은 맑고 잘 생긴 보름달이 그 모든 어둠을 당당하게 밟고 떠올랐으면 한다. 그래서 침체된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이라는 행복이라는 빛으로 옷을 갈아입혀 주도록 보름굿이라도 한판 크게 벌이고 달불이라도 놓았으면 좋겠다.
달집태우기하면, 청도의 생솔가지 태우는 연기 속에서 떠오르는 달과 지는 해가 함께 멀거니 서로 바라보는 모습과, 감포 전촌 앞바다에서 수입 자라를 방생하는데 갈매기들이 그 자리에서 바로 물고 날아오르는 풍경을 아직 잊을 수 없다.
이런 요란스런 기도보다는 자신의 마음 그릇을 잘 닦아야 밤길이 밝아지겠지만, 그래도 꽃 활짝 피어나는 봄의 순산을 위해 그 희망의 줄을 힘껏 당겨보고 싶은 마음 또한 정성이 아니겠는가.
정숙(시인)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