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샤이닝 프로그램 "처벌보다는 따뜻한 관심이…"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 서울에서 재수하던 친구가 내려와 칠포 해수욕장에서 한잔 했지. 그런데 동네 청년들과 시비가 붙게 된 거야. 어떻게 됐을 것 같애?"

공원식(54) 포항시의회 의장이 30여 년 전의 이야기를 꺼내자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시의원이라면 꽤 성공한 사람일 텐데, 젊었을 땐 한가락 했나 본데….'

"싸우다 보니 다들 도망가고 나와 내 친구 하나만 남았어. 친구는 칼을 쥐고 있었고. 그러다 어찌 잘못해서 그만 상대편을 찌른 거야. 친구는 도망가고 나만 남아 죽도록 얻어맞았어. 그때 포항 시내에 한 명은 칼에 죽고 한 명은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났다니까."

공 의장의 무용담 아닌 무용담이 이어지자 아이들의 반응이 금세 시큰둥해진다.

'시시하군. 그러면 그렇지.'

아이들의 실망을 눈치챈 듯 공 의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내가 싸운 게 아니야. 나보다 형편이나 공부나 모두 앞섰던 그 친구는 결국 도망자가 돼 전과 5범으로 어렵게 살고 있어. 난 여러분 보듯이 맘 잡고 새출발했어. 한 때 실수는 누구나 있는 거야. 얼마나 빨리 극복하느냐가 중요해."

아이들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빗장이 채워진 채 굳게 닫혔던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공 의장이 만난 아이들은 2일 오전 포항 북부경찰서에서 열린 경북경찰청의 '샤이닝 프로그램'(Shining Program·학교폭력 가해자 선도대책)에 참가한 포항 모 고교 '짱'인 정수(16·이하 가명)와 중호, 상준, 상우 군. 지난해 겨울 후배들에게 군고구마 장사를 시켜 370여만 원을 뺏고 13차례에 걸쳐 폭행한 혐의로 입건 또는 훈방된 고교 2년생들이다.

"진정한 사나이가 마음을 다잡으면 정말 멋지게 살 수 있다는 말이 귀에 쏙 들어옵니다.

저도 알고 있는 의장님 친구 한 분이 당시 포항 전체 '짱'이었다는 말은 도저히 믿기질 않아요. 그분은 그랬을 만한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침묵을 지키던 '짱' 정수가 입을 열자 공 의장이 다시 말을 받았다.

"우리 때도 학교마다 불량서클은 다 있었어. 수학여행을 못 갈 정도였던 가난이 싫어 나도 중2때부터 자퇴와 가출을 거듭했지. 지금은 유학까지 다녀온 내 아들이 가끔 그래. 아버진 서울까지 도망갔지만 난 부산까지밖에 못 가 잡혔으니 아버지보다 착하다고."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이날 아이들은 자신의 수사를 맡았던 형사들과 '인연'을 맺었다.

조언과 도움을 주고 받는 멘토(Mentor)와 멘티(Mentee)가 된 것. 사건 이후 아이들은 본의(?) 아닌 잦은 접촉으로 이미 형사들과 친숙해진 사이였다.

중호는 조언자 역할을 맡은 강력팀 이담화(39) 형사와 미래의 술 약속까지 잡아 놓았다.

"저보다 덩치도 작은 형사님이 폭력배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분이라는 말을 듣고는 거짓말 같았어요. 조사받을 때 너무 친절하셨던 데다 졸업한 뒤엔 소주 한잔 사겠다는 말까지 하셨거든요. 저도 경찰이 될 수 있다는 말에 희망도 생겼죠."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일당 2만 원을 받고 중국집에서 '철가방'으로 일하는 상우도 끼어들었다.

"같이 놀러갈 돈을 마련하려다 후배들을 시키면 더 편할 것 같아 그랬는데 이렇게 큰 일이 될 줄 정말 생각 못했습니다.

유치장 앞에 서니까 다리가 후들거리던데요. 사실 중학교 때 오토바이를 훔치다 잡혀 와 봤거든요. 정말 이제 다시는 오진 않겠습니다.

"

형사들의 일을 직접 해봄으로써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형사 체험근무'가 끝나자 경찰차를 타고 범죄 취약지 기동순찰을 나갔다.

아이들은 다시 들뜬 모습이다.

"형사님, 애들 괴롭히는 나쁜 친구들 보면 제가 수갑 채우면 안 될까요. 진짜 한번 해보고 싶어요." 사업가가 꿈이라는 상준이가 강력팀 박해문(40) 반장에게 떼를 쓰자 대뜸 꾸중부터 쏟아진다.

"이놈들아, 너희가 형사야? 형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냐. 열심히 오늘 배우고 정말 다음에도 나쁜 짓 않으면 한번 만지게는 해줄게."

"애들이 처음 잡혀와 조사받을 때는 분위기 탓인지 주눅만 들었을 뿐 반성하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처벌 대신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주니 이젠 뉘우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덩치들은 남산만 해도 애들은 애들이네요." 순찰을 마치고 경찰서로 돌아오는 길에 이수용 포항 북부서 수사과장의 얼굴엔 미소가 흘렀다.

이상헌기자 davai@imaeil.com 포항·박진홍기자 pjh@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