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익명의 쾌감'에 빠지는 군중은 누구인가?

군중심리/ 귀스타프 르 봉 지음/ 간디서원 펴냄

'개똥녀'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개똥녀'는 지하철에서 애완견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은 채 욕설과 함께 내렸다는 젊은 여인에게 붙여진 이름. 인터넷에는 심지어 그녀가 H여대생이니, C예대생이니 확인되지도 않은 신원이 나돌고 있고 사진 찍은 사람들을 고소하겠다는 내용의 반론 글까지 떠도는 지경이다. 그녀에게 '개똥녀'라는 악칭을 붙인 것도, 인터넷 사형선고를 내린 것도 다름아닌 네티즌, 즉 사이버 군중이었다.

이 같은 '인민재판식 여론몰이'가 처음은 아니다. 지난달 인천의 한 시민단체 홈페이지에는 "H대 학생이 장애아인 우리 아이를 때렸다"는 내용의 글이 올랐다. 이어 H대학 총동문회 홈페이지 게시판은 각조 항의글로 도배됐다. 가해자로 지목된 S씨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지만 이미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뒤였다. 지난 4월에는 애인에게 버림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한 여인의 사연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인터넷에는 추모카페가 만들어졌고 그의 애인으로 지목된 김모씨의 직장과 사진, 휴대전화 번호까지 순식간에 유포됐다. 결국 김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잠적했다. 3월에는 서울대 도서관에서 다른 학생과 말다툼을 벌이다 주먹을 휘두른 한 학생의 신상이 인터넷에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여자친구의 신원까지 공개되는 소동 끝에 해당 학생은 휴학을 하고 연락을 끊었다.

'희생양'에겐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인민재판식 마녀 사냥은 옳지 않다는 자성의 목소리는 금세 묻혀 버린다. 군중의 힘이다. 인터넷은 군중이 조직화할 수 있는 최고의 광장이다. 사이버 군중은 양은 냄비처럼 끓었다 식기를 반복한다.

군중의 집단 심리는 온라인 상에서만 조직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4월 야외 수업에 나선 중학생 수백 명이 대낮에 편의점 물건을 닥치는 대로 들고 나온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일체험 학습의 하나로 문화회관을 둘러본 경기도 수원의 K중학교 학생 400여 명이 편의점에 몰려와 껌과 음료수, 과자 등을 닥치는 대로 집은 채 사라진 것. 학생들의 장난기와 군중심리가 결합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손을 잡고 건너면 빨간불도 무섭지 않다.' 일본인들의 유별난 군중 심리를 빗댄 말이지만 우리 사회에도 별반 어색하지 않게 적용된다. 귀스타프 르 봉은 '군중을 형성하는 개인이 누구이건, 그들의 생활양식, 직업, 성격, 교양이 비슷하건, 비슷하지 않건 그들이 군중화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일종의 집단심리를 갖게 하며 여기에서 사람들은 평상시의 개인이었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하게 된다'고 분석한다.

'군중심리'는 군중의 행동을 상세히 짚어낸 책이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사회심리학자인 귀스타프 르 봉은 군중의 심리에 초점을 맞춰 군중의 일반적 특성과 감성, 도덕성, 지도자들이 사용한 군중 설득 수단 등을 상세히 설명한다. 특히 군중심리를 이용한 실례와 역사적'경제적 현상까지 다루고 있다. 이 책은 프로이트뿐 아니라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파시스트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이들은 르 봉의 연구를 대중선동의 지침으로 활용했다.

이 책이 출간된 지 벌써 110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 책의 많은 논리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저자는 군중을 형성하는 개인은 오직 수적인 힘을 느낀 나머지 혼자 있을 때는 억제했던 본능을 마구 발산한다고 말한다. 익명의 쾌감에 빠진 군중은 무책임하며 군중의 특성은 빠르게 감염된다는 것. 감염성은 집단 이익을 위해 개인 이익을 희생시킬 정도로 대단하다.

그러나 군중을 부정적이고 우매한 집합으로 파악한 저자의 논리를 이 시대에 겹쳐 보기엔 무리가 있다. 저자는 근대사회의 민주주의를 군중 지배의 산물로 분석했고 근대사회의 인간을 비합리적'감정적인 인간으로 간주했다. 귀족주의적'부르주아적 입장에서 군중에 대해 공포와 불신의 감정을 갖고 있던 르 봉에겐 당연한 귀결이다.

하지만 르 봉의 군중을 멸시하는 듯한 군중관은 반민주주의적인 보수주의 사상에 다름 아니다. 특히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만들어낸 사상가로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의 숱한 비난을 받았다. 사실 현대의 대중사회가 이념과 제도가 아니라 대중의 격정과 원동력을 이끌어내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그의 논리는 끔찍했던 군부독재 시대를 겪어온 우리에게 묘한 느낌을 준다.

저자가 예견한 '군중의 시대'는 분명 도래했다. 21세기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내리는 결론이 소수 천재들의 지적능력에 결코 뒤지지 않는 시대다. '군주가 행해야 할 행동을 명령하는 것은 바로 이 군중의 목소리고 군주는 군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국가들의 운명은 이제 군중의 마음 속에서 결정된다'는 르 봉의 외침이 여전히 그 빛을 발하는 이유다.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