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염색공장의 여름, 서 있어도 땀이 난다

33℃. 13일 대구 낮 최고기온이다. 올 들어 가장 뜨거운 날이다. 가만히 서 있어도 더운 날, 뜨거운 일터에서 땀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다. 불꽃을 튀기며 일하는 용접공, 용광로에서 작업하는 제철소 직원, 뜨거운 복사열을 견디며 도로포장 작업을 하는 공사장 인부들…. 유치환의 시 '생명의 서'에 나오듯이 '열사(熱沙)의 끝'에서 일을 하며 우리 경제를 이끄는 사람들이다.

기자가 찾아간 곳은 대구 서구 비산염색공단에 위치한 한 염색공장. 180∼200℃의 열기를 내뿜는 기계들 사이에서 일해야 하는 곳이다. 여름의 첫 자락을 맞은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나봤다.

◇벌써 더워요?

13일 오후 3시 비산염색공단 내 무길염공. 2천 평 규모의 공장에는 수십 대의 염색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공장에 들어서자 현장책임자 김태추(44) 차장이 "기자양반, 오늘 좀 더운데 일할 수 있겠어요?"라며 겁부터 줬다. 현장에서 간단히 공정에 대해 들은 뒤 먼저 원단 나르기부터 시작했다.

제직공장에서 넘어온 가공 전 생지가 들어오면 먼저 가성소다에 담가 부드럽게 만드는 '정련'과정부터 해야 한다. 정련 후 약품을 씻어내기 위한 '수세'공정이 뒤따른다. 물을 먹은 생지 수레는 대략 50㎏ 정도 돼 보였다. 생지를 염색기까지 옮긴 뒤 염색기에 집어넣고 염료와 물을 넣으면 염색이 시작된다. 요즘은 기계가 좋아 대부분 자동으로 진행된다.

고속으로 기계에 빨려들어가는 원단이 말리지 않게 잡아주는 것도 쉬워보이진 않았다. 3시간 30분간의 염색이 끝난 뒤 텐터기(건조기)에 들어가 말리는 과정을 거치면 하얀 생지는 빛깔 고운 원단으로 변신한다.

200℃ 고열을 내뿜는 텐터기 옆에서 원단이 잘 들어가는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땀은 저절로 나기 시작했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지켜보고 있던 이영주(32) 차장은 "벌써 더워요? 아직 염색공장에 여름은 멀었는데…"라고 말해 기자를 무안하게 하였다.

◇공장의 변신

염색은 3D업종의 대명사다. 하지만 이 공장에만은 해당되지 않는 듯했다. 높은 천장, 넓은 실내, 완벽한 환기 시스템, 깨끗한 바닥, 버튼만 누르면 돌아가는 기계 등. 지은 지 6년밖에 안 되는 이 공장의 설비 대부분은 자동화가 됐다.

덕분에 일하는 동안에도 생각만큼 덥지 않았다. 17년째 염색업에 종사하는 김 차장은 "염색업종 성수기가 한여름이어서 여름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며 "하지만 여기는 다른 공장보다 천장이 높고 환기가 잘 돼 예전보다 훨씬 작업하기 수월하다"고 말했다.

공장 2층에 위치한 염료조제실. 분말염료를 물에 섞어 염료를 만드는 곳이다. 예전 같으면 일일이 바가지로 퍼 나르면서 염료가루가 많이 날려 작업자의 건강을 해쳤다. 때문에 과거에는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분진수당을 따로 줄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도 최근 1억5천여만 원을 들여 컴퓨터로 입력만 하면 염료의 색을 맞추는 자동화를 이뤘다. 염료실 하상기(43)씨는 "자동화를 통해 환경도 좋아졌고 염료 색의 정확도도 높아져 품질이 한층 나아졌다"고 말했다.

◇투자만이 살 길

섬유공장들의 큰 특징은 젊은 사람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보수도 문제지만 나쁜 근무 환경 때문에 젊은층이 기피한다. 이 회사 역시 다른 공장보다는 젊은 사람이 많지만 근로자들 대부분이 10년, 20년 이상 장기근속자이다. 게다가 섬유경기 악화로 신규인력보다 다른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옮겨온 경우가 많다. 염색은 기계보다 기능인력이 품질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장인력들이 고령화하면서 과거 가졌던 기술우위를 언제 중국에 빼앗길지 모르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김 차장은 "최근 공단에서 젊은 신입사원을 구경한 지 오래다. 힘든 일을 기피하는 젊은 사람들도 문제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대구 섬유산업의 대(代)가 끊기지나 않을지 걱정"이라며 씁쓸해 했다.

때문에 작업환경 개선과 시설 자동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이 회사 박광렬(59) 대표는 "작업환경을 개선해야 근로자들이 편하게 일을 할 수 있고 고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있다"며 "CEO가 눈앞의 돈에 급급하기보다 꾸준히 투자를 해야 섬유산업의 미래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재교기자 ilmare@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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