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영관의 인물탐방] 대한건설협회 권홍사 회장

성공한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는 소설보다 재미있다. 슬픔과 고난이 컸기에 기쁨과 영광의 팡파르는 길고도 높다. 고난과 역경이 사람을 키운다는 말은 대한건설협회 권홍사(權弘司·62)회장에게서 실감난다. "맨 정신에 하려니 싱겁다"며 운을 뗀 그는 땅 한뼘조차 물려 줄 것 없던 아버지를 "현명한 분"이라고 추켜세운다. 논 몇 마지기만 물려주었더라도 오늘의 그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일본서 났다. 두살배기 시절 돌아온 귀환동포다. 고향인 의성 다인에서의 어린 시절은 힘들고 외로웠다. 늑대도 나오던 시절, 나무하러 가는 20km 산길에서 열살 어린애의 배고픔은 고통이었다. 외따로 떨어진 집은 상여집과 으스스한 못을 지나야 했다. 혼자 가는 길은 무서웠다. 그러나 어린시절 고통은 그에게 인내를 가르쳤고 외로움은 한평생 용기있게 사는 법을 알게했다.

배고픔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상처가 더 아프고 힘들었다. 고향 땅에 돌아 온 사람 좋은 아버지는 일본서 가져온 돈을 퍼주기에 바빴다. 당연히 얼마안가 살림은 거덜났다. 온 식구를 굶겨 죽이겠다고 여긴 어머니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어쩌다 마을에 자동차가 들어오면 어머니가 왔을까 달려가 봤지만 언제나 상처만 돌아왔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초등학생이던 그를 부산으로 가게 했다. 밀항선이라도 타고 일본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다 '거지꼴로 어머니를 만나면 무엇하랴'며 생각을 고쳤다. 품을 팔며 공부를 이어 갔다. 동아대 건축과를 다니던 시절에는 하숙집을 지어 팔았다. 건축업계에 첫 발을 내디딘 사업이었다.

좋은 집을 지어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건축업을 택하게 했다. 지난 84년 180가구의 아파트를 지었다. 당시로선 대단지였기에 주변에선 무리한 시도라며 말렸다. 그러나 계약률 100%의 성공이었다. 이제는 사업체가 10여 개에 이르는 부산 굴지의 중견 사업가로 떠올랐다.

몇년전부터는 서울과 수도권으로 영역을 넓혔다. 서울 사람들도 그가 지은 '보라빌' 아파트에 몰렸다. 보라는 시집간 맏딸 이름이다. 사랑하는 딸을 키우는 것처럼 정성을 들여 지었다는 자부심을 서울 사람들도 인정해 주었다. 그 딸이 이름값을 달란다며 웃는다.

지난 2월 건설업계 도약과 혁신을 내건 그에게 대한건설협회 회장직이 맡겨졌다. 정부의 부동산 억제정책으로 인한 건설경기 위축이란 난제 외에도 SOC 투자 확대, 최저가 낙찰제의 보완 등 협회 회장으로 헤쳐 가야 할 숙제가 적잖다. 건설협회장을 맡으면서 본사는 부산에 두되 사업체의 기능을 서울로 옮겼다.

의성 다인의 고향 마을은 울적할 적이면 찾는 그를 언제나 포근하고 따뜻하게 안아 준다. 고향 비릿재에 쉬어가는 나무집을 만들었고 일년에 한번은 노인들을 모신다. 협회장에 당선되자 고향마을에 현수막이 걸렸다. 어린 시절 급장을 하라던 어머니가 새삼 생각났다.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를 생각하면 어린시절이 다시 돌아온다.

논설위원 seo123@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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