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사과 볼이 한창 빨갛게 익어가는 늦가을, 길 가던 나그네가 배가 출출해지면 별 망설임도 없이 길가 과수원의 사과를 따 먹었다. 동네 개구쟁이들이 사과 서리를 하다 주인에게 들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도 주인들은 대개 "이놈들!" 한마디 고함치곤 그만이었다. 짐짓 험상궂은 얼굴로 뛰어오는 주인도 있었지만 아이들을 내쫓느라고 던지는 게 돌멩이가 아닌 사과였다. 장난꾸러기들은 "이게 웬 복?"이냐며 희희낙락하고….
▲밀 이삭이 팰 무렵엔 밀서리를, 감자철이면 감자서리를, 참외철엔 참외서리를, 논두렁 콩이 통통해질 무렵엔 콩서리가 농촌 아이들에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심할 경우 닭서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아주 가벼운 정도에 그쳤다. 숟가락 숫자까지 서로를 빤히 아는 이웃들인 데다 내 집 아이 역시 같은 짓거리를 하는 판이라 어른들은 알고도 짐짓 눈감아 주었다.
▲아이들 역시 서리를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선 긋기가 있었다. 예컨대 밀 이삭은 몇 개만 꺾자든지, 감자는 뿌리째 뽑지 않고 두어 개만 캐자든지, 참외는 밭두덕의 참외를 발로 밟아 깨지 않도록 밭고랑으로만 다닌다든지 그런 일종의 불문율이 있었다. 주인에게 해를 입힐 정도면 이미 도둑질이 돼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의 서리 풍경엔 절대 경계를 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서리가 사라진 요즘, 해마다 추수철이면 농산물 도둑이 설친다. 갈수록 그 도가 심해진다. 올해는 기생충 알 김치 파동 탓에 배추와 무 도둑이 한층 극성스럽다. 한여름 뙤약볕에 까맣게 타면서 꼬부라진 허리를 펼 새도 없이 키워 온 무'배추며 고추며 인삼 등이 밤새 사라지고 있다. 길에 널어놓은 벼는 진공흡입기로 싹쓸이해 가 버린다. 심지어 자식 같은 송아지도 끌어가 버린다.
▲텅 빈 밭을 바라보는 노인들은 그저 한숨이요, 눈물이다. 애지중지 키워 온 일 년 농사가 한순간에 헛수고가 되었으니 그 상실감은 상상할 수도 없다. 양심 실종의 파렴치 도둑들 때문에 많은 농촌 노인들이 지금 화병앓이를 하고 있다. 경찰이 순찰을 강화하고 일부 지역에선 CCTV까지 설치하는 등 대책을 세우고 있지만 날뛰는 도둑 앞에 속수무책이다. 농촌 노인들의 야윈 가슴을 시퍼렇게 멍들게 만드는 사회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전경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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