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의 배경
지난 달 발간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 역사 인식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해방 전후사에 대한 해석을 놓고 진보와 보수 진영의 격돌도 시작됐다. 80년대 진보적 역사해석을 대표했던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필진인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가 최근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포럼에 기조강연자로 나서는가 하면, 뉴라이트 성향의 자유주의연대는 다음 달까지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재인식' 저자들의 순회강연을 열 계획이라고 한다.
1979년 첫 발간돼 1989년까지 10년 동안 총 6권으로 마감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군사독재정권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현대사 연구를 억누르던 시절에 빛을 보았다. 대학가에서 이른바 '해전사'로 불리던 이 책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넘어 광복에서부터 미군정, 단독정부 수립, 한국전쟁 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재인식'은 '인식'에 대한 안티테제로 정립됐다. '인식'이 기성관념을 극복하기 위해 일방에 경도되고 친일/반일, 애국/매국, 수탈/핍박이라는 이분법에 매몰된 측면 등을 지적하고 있으나 이는 책의 한계라기보다는 당시 한국사회의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시대적 한계를 넘어 새로운 '인식'을 쟁취하려는 모습은 결과 여부를 떠나 신선해 보인다.
▨ 해방 전후사를 재인식하는 데 남는 문제점들
'재인식'은 식민지 역사를 천편일률적인 착취 피착취 관계로 해석하는 데 반대하고 있다. 몇 개의 주제는 '인식'에서 나타난 시대 정신을 배경으로 학술적 다양성을 모색하기도 한다. 그러나 '재인식'은 근본적으로 '인식'에서 보여준 역사인식을 통째로 바꾸겠다는 의도 때문에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최종 판단은 성급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치열함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가 갈구하는 것은 단순히 역사의 '재인식'이 아니다.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비교해보면 상당히 잘 되어온 나라"라는 식의 '재인식'은, 비록 균형감은 없었지만 시대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려했던 선배들보다 오히려 못하다. 차라리 소박한 차원에서 과거를 당대의 입장에 맞춰 "따뜻하게 이해하고 싶다"는 것이 '재인식'의 진정한 목표였다면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옛 '인식'을 '따뜻하게 이해'해주는 대신 현재의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과 직결시키고 있는 점을 미루어볼 때 그 진정성을 신뢰하기 힘들다.
우리 시대의 역사학이 추구해야 할 것은 과거의 진실에 대한 독점권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에 대한 접근을 민주화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가 학문적 연구의 치밀함을 포기해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나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안이하게 과거를 대하던 형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 역사는 인터넷을 위시한 각종의 매체들 속에서 활발히 생산·유통·소비되고 있다. 역사가는 이 전반적 현상에 대해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재인식'이 사회적 파장을 도외시하고 단순한 객관성을 추구했다면 이는 직무유기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언론을 활용하여 특정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려 했다면 이는 떳떳하지 못하다. 역사논쟁은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 논쟁일 수밖에 없다. 이데올로기 논쟁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시의성도 없는 (냉전)이데올로기를 걸고 논쟁하는 것이 나쁘며 더구나 그것을 위장하는 것은 더 나쁘다.
사실 '재인식'에 수록된 28편의 글 중에는 인상적인 것들이 여럿 있기에, 이들이 내포하는 다양한 분석적 층위를 하나의 논리로 '재단'하는 것은 궁색해만 보인다. 예를 들어 일제 식민지시대 조선인들의 삶을 분석함에 있어서 단순히 협력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제국에 대한 혐오와 선망이 공존했음을 복합적으로 밝혀내려는 시도는 매우 고무적이다. 또한 총독부가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지원했던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일제 식민통치가 단수한 수탈이 아니라 보다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제국 건설의 아젠다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밝힌 것도, 비록 아주 새롭지는 않지만 흥미롭다.
그러나 '재인식'이라는 강박적 목표 아래서 논의는 조야한 '수탈론'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으로 이어지는 '근대화론'을 제기하는 차원으로 협소화되고 만다. 왜 그렇게 급한 것일까? 차라리 결론을 유보하는 편이 더 낳았을 지도 모른다. 그저 양적 경제수치에 의존한 성장론이나 국가의 일체화된 '파시즘적' 지배 형태가 지닌 연성을 규명하는 것만으로 모더니티라는 다면적 현상을 논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모더니티(modernity)를 거론하기 위해서는 제국의 권력과 자본, 욕망이 식민지에 유입되고 충돌하며 식민지적 굴절을 거쳐 일정한 형태를 이루고, 또한 그 안에서 탈구되는 다층적 메커니즘을 시공(時空)의 맥락에서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수탈이냐 근대화냐 논의는 이제 너무 진부하다. 이미 '재인식'안에도 이러한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하 법치와 권력」을 다루면서 필자 이철우는 "수탈-저항 이분법과 진화론적 근대화 담론(을) 모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본질주의적 거대서사"를 경고한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연구의 잣대에 따라 구별하는 것 또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선악 이분법적 역사 서술에 지나지 않는다."
▨ 해방 전후사의 올바른 인식법
다양한 접근의 시도는 응당 필요하지만 구조적 악과 의도적 범죄의 차이를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위험성을 극복하는 길은 역사의 윤리적 가치를 인식론적 가치와 동등하게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이는 "민족에 앞서 인권과 자유가 먼저"라는 편집자의 말이 진정한 설득력을 얻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재인식'이 궁극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과거 청산'이라는 사안이 새롭게 조망될 수 있다. 현재 정부의 과거 청산 정책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역사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역사가의 몫이며 정치판에서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라는 고정된 사고방식은 재고되어야 한다.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은 역사의 인식론적·정치적·사회문화적·윤리적 가치들의 다양성 및 이들의 장애 없이 상호 소통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과 결합되지 못할 때 공허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명백한 인권 유린에 대한 논의가 인식의 다양성이라는 미명 하에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이 소모적인 정쟁을 넘어서 보다 치열하고 반성적인 역사 논쟁의 기폭제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 뉴라이트
'신우익'이라는 의미로 1980년대 영국과 미국의 정책 사상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결합된 형태의 이데올로기를 추구한다. 인간의 기본 적인 평등과 복지보다는 시장 경제와 전통을 중시한다. 또 인간의 인권이나 평등보다는 사회적 규칙이나 도덕적 윤리를 강조하며, 그 어떤 인권보다 개인의 재산권을 중시해 분배보다는 성장을 우선시 한다.
▲반민특위
일제 강점기 36년간 자행된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1948년 제헌국회에 설치되었던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를 줄여 부르는 말.
▲모더니티
'근대성'이나 '현대성'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는 것으로, 주로 역사적인 개념이거나 철학적 개념이다. 모더니티의 특징을 보면 공통된 언어와 전통에 기초를 둔 단일 민족국가의 성립을 탄생시켰으며, 인간의 문제에서 이성의 권위를 가장 우위에 두었다. 또 대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는 데 무엇보다도 자연과학의 권위에 의존했다. 이밖에 자유 시장 경제체제를 도입하고 그것에 수반되는 임금 노동과 도시화, 생산 수단의 개인 소유를 적극 장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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