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루(映湖樓)는 안동 낙동강 가의 누각이다. 안동 사람들은 자기 고장 자랑이 전국 으뜸이다. 자랑 거리에서 영호루가 한 몫 단단히 했다. 영호루는 고려 시대에 만들어 연조가 아주 높고, 안동에 왔던 공민왕이 써서 보낸 금자 현판을 달고 있어 지체 또한 최상이라고 했다.
영광에 불운이 따르는 것이 정한 이치인지, 홍수 피해를 자주 입어 다시 짓기를 몇 번이나 거듭했다. 1934년에는 주춧돌만 남고 완전히 떠내려갔다. 1992년에 세운 '영호루유허비'(映湖樓遺墟碑)가 원래의 자리를 말해준다. 1970년에 다시 지었으나 볼썽사나운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낙동강 북쪽에서 남쪽으로 위치를 이동했다. 올라가서 강 건너 안동 시내를 바라보도록 했다.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했다. 졸필 한글 현판을 달아놓았다.
그래도 영호루를 외면하지 말고 있는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 유래나 건물보다 시문이 더욱 소중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조선초기까지의 것들만 해도 산문이 4편이고, 시는 14편이다. 다시 읽으면 선인들의 정신세계에 깊이 들어갈 수 있다 하겠는데,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한결같지 않고 대립되는 견해를 가지고 논란을 벌인다.
해산당일왕래다 海山當日往來多 바다며 산이며 지금까지 많이도 오갔지만
물외정신도차가 物外精神到此加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여기 오니 한층 더하네.
초위몽유운우협 初謂夢遊雲雨峽 처음에는 운우의 골짜기에서 노는가 했더니,
점의신입화도가 漸疑身入畵圖家 몸이 점차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가 의심되네.
남강추야천봉원 南江秋夜千峰月 남쪽 강 가을밤에 천 봉우리에 달이 돋고,
북리춘풍만수화 北里春風萬樹花 북쪽 마을 봄바람에 일만 꽃이 피어나네.
수시무정한도자 雖是無情閑道者 제 아무리 무정하고 한가하다는 도인이라도
등림부득이고사 登臨不得似枯 ? 여기 오르면 마음이 마른 뗏목 같지 않으리.
채홍철(蔡洪哲)이 지은 이 시에서는, 영호루 일대의 경치가 으뜸이라고 칭송하면서 자기가 누리고자 하는 "물외정신(物外精神)"과 부합된다고 했다.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번역한 그 말이 세속의 물욕을 버리고 고결한 도리를 추구하자는 것은 아니고 그 반대이다. 선경과 같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 호사스럽고 화려한 삶을 누리는 향락을 바랐다. 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위인이야 말라비틀어진 뗏목 같아 아름다움을 즐기면 마음이 달라질 것이라고 조롱했다.
채홍철은 고려 말에 국권을 장악하고 부귀를 누리던 권문세족 가운데 문학과 음악에서 이름을 남긴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송악산 자하동 선경과 같은 곳에 화려하기가 극치에 이른 대저택을 마련하고 나라의 원로라는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며 천년 장수를 할 술을 마신다고 자랑했다. 바로 그런 연유로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은 굶주리지 않을 수 없었기에,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항변하면서 나선 비판세력이 신흥사대부였다.
사대부는 원래 지방의 향리였다. 무신란 이후에 중앙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하고 원나라에 복속된 기간에 실력을 다지다가, 고려가 자주를 되찾게 되자 권문세족과 대결을 벌여 마침내 조선왕조를 건국했다. 불리한 처지를 사상과 문학의 역량으로 극복해 역사 창조의 방향과 논리를 휘어잡을 수 있어 승리를 거두었다. 그 선두주자인 우탁(禹倬)은 아버지 대에 처음 벼슬했다. 과거에 급제해 지방관이 되어 민간신앙을 타파하는 데 힘썼다. 성리학이 수입되자 깊이 탐구해 교육했다. 영호루에 올라 이렇게 읊었다.
영남유탕열다년 嶺南游蕩閱多年영남을 여러 해 동안 두루 돌아다니면서
최애호산경기가 最愛湖山景氣加이 물가와 산의 경치를 가장 사랑했네.
방초파두분객로 芳草波頭分客路향기로운 풀 끝머리에서 나그네 길 갈라지고,
녹양제반유농가 綠楊堤畔有農家버들 푸른 둑 곁에 농가가 있구나.
풍염경명횡연대 風恬鏡面橫煙黛바람 잔 거울 위로 안개 낀 산 비껴 있고,
세구장두장토화 歲久墻頭長土花오랜 세월 담 머리에 이끼가 자랐구나.
우헐사교가격양 雨歇四郊歌擊壤 비 갠 뒤 사방의 들에서 격양가 노래하고,
좌간림초초장한사 座看林?漲寒?수풀 끝에 밀려 있는 뗏목 앉아서도 보인다.
유람객 노릇을 하며 가서 그 고장 사람 같은 의식을 가지고자 했다. 누각에서 바라본 경치를 애정 어린 눈으로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농민 생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격양가를 노래하고 뗏목을 젓고 다니는 광경을 흐뭇하게 여겼다. 경치와 생활, 오랜 세월과 지금의 상태가 아무 갈등 없이 잘 어울려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라고 한 "뗏목"이 앞에서 든 채홍철의 시, 다음에 드는 권근의 시에서와 함께 등장하는데, 뜻이 다르다. 뗏목이 채홍철의 시에서는 마른 나무일 따름이고, 권근의 시에서는 자기가 타고 물을 건너가는 데 소용되는 도구이다. 우탁이 보고 묘사한 뗏목은 지방 하층민의 생활도구이다. 뗏목을 수풀 끝에 밀어놓은 것은 강을 건너 그쪽으로 가서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권근(權近)은 위의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에 태어난 새로운 시대 사대부의 중심인물이다. 고려 말에 이미 상당한 활약을 하면서 시련을 겪다가 조선왕조 창건에 가담해 핵심 과업을 담당했다. 위에서 든 두 편과 말하고자 한 바가 많이 다른 시를 남겼다.
객이등루감탄다 客裏登樓感歎多나그네 처지로 누대에 오르니 감탄이 많고,
권유영득빈사가 倦遊?得?絲加게으르게 놀고 있어 귀밑머리 더 희어진다.
해천유객공회국 海天流落空懷國멀리 밀려났으면서 공연히 서울 생각이며,
향군귀래미유가 鄕郡歸來未有家고향에 돌아왔으나 집이라고는 없구나.
백척위란부벽락 百尺危欄浮碧落백 척 위태로운 난간 푸른 공중에서 떨어지고,
구중신한요금화 九重宸翰耀金花구중궁궐 임금의 글씨 금빛 꽃으로 빛난다.
장천회여은하접 長川廻與銀河接긴 내가 돌아가면서 은하와 맞닿았으니
직욕초초범일사 直欲??泛一? 지금 당장 뗏목 띠워 멀리 가고 싶네.
권근은 원래 안동 사람이다. 고향을 찾았어도 집이 없다고 하면서 머무를 처지가 아님을 말했다. 멀리 밀려나 서울을 생각한다고 한 것을 보면 귀양 가는 나그네인 것 같다. 영호루의 높고 위태로운 모습이나 금으로 쓴 임금의 글씨가 자기와는 거리가 있어 반감을 느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더욱 초라해진 신세라도 좌절하지 않으면서 굴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마지막 두 줄에서 말했다고 보아야 앞뒤가 연결된다.
"백척위란부벽락(百尺危欄浮碧落) 구중신한요금화(九重宸翰耀金花)"라는 대목이 권근의 문집 '양촌집'(陽村集)에는 " 벽와능풍부기율(碧瓦凌風膚起栗) 금서조일안미화(金書照日眼迷花)"로 적혀 있다. "푸른 기와에 바람이 일어 소름 돋고, 금 글씨 해에 비치어 눈이 부시도다"라는 뜻이다. 소름이 돋고 눈이 부신다고 하는 섬뜩한 말로 반감을 직감적으로 표현했다. 그래서는 자랑거리가 손상된다고 여기고 안동 사랑의 정신을 발동해 개작한 것을 새겨서 내걸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올랐다고 생각된다.
권근은 일시적인 고난을 겪고 있어 영호루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고 생각된다. 근처에 사는 백성들은 언제나 그런 처지에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주위의 산수와 잘 어울려 영호루는 분명 아름답지만, 함부로 올라서지 못하게 하는 위세를 뽐내 반감이 생겼을 것이다. 찾아와 잔치를 벌이는 고관대작 등쌀에 편하게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 사람의 영호루 시는 운자가 같고 글자도 몇 자 같으면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시가 무엇이고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를 상이하게 보여줄 수 있게 하는 것이 영호루가 대단한 문화재라고 해야 할 깊은 이유이다. 역사의 방향을 두고 논란을 벌인 현장임을 알아차려야 가치가 커진다.
안동은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자처하고 있다. 허장성세가 아니게 하려면 문화유산을 제대로 돌보아야 한다. 영호루를 원래의 위치에 옛적 모습으로 다시 지어야 하는 것이 긴요한 과제의 하나이다. 옛 사람들의 시문을 현판에다 새겨 거는 데 그치지 않고, 진정한 가치를 알아차릴 수 있게 해설하기까지 하면 더 좋을 것이다.
조동일 계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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