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이 떨어져서 물위에 흐른다/ 흐르는 것은 물인가? 꽃인가?/ 불현듯 사람이 보고 싶고나! / 꿈밭에 봄마음이 가고 또 간다' (봄마음.1)
'복사꽃이 떨어져서 물위에 흐른다/ 흐르는 것이 무엇이기에/ 불현듯 가슴이 더워오는가! / 너도 가고 나도 가고 다 떠난 자리/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나 있다'(봄마음.2)
철이 들 무렵, 버리듯 떠났던 고향을 사십여 년 만에 돌아와 세 번째 봄을 맞는다. 첫 해 봄과 두 번째 봄에는 봄을 맞고 보내는 소회를 이렇게나마 썼는데 금년은 그냥 넘기는 것 같다.
황사와 감기로 십여 일 멍하게 지내다가 오늘 나가 보니 앞 뒷산에 곱게 피어있던 복사꽃들이 어느새 다 지고 흔적이 없다. 내가 앓는 동안, 꽃들도 지느라 얼마나 아파했으며, 떨어져 흩날리는 꽃잎을 안고 가느라 여울은 또 얼마나 울고 갔는지 모를 일이다.
꽃이 아름다운 건 지는 아픔이 있기 때문이며, 사랑이 아름다운 건 이별이 있기 때문이리라. 복사꽃은 졌지만 아직도 앞 뒷산 구렁과 비탈에는 늦게 핀 산벚과 조팝꽃들이 희게 붉게 산을 밝히고, 들에는 민들레며 꽃다지며 좁쌀 같은 작은 풀꽃들이 세상을 온통 장엄하고 있다.
무심하려 해도 오묘한 생명의 질서 앞에 가슴 벅차고 눈물까지 나려하니 그것이 병 아닌가. 생자필멸 회자정리(生者必滅 會者定離). 났기 때문에 죽고, 만났기 때문에 떠남이 있는 것은 필연인데 말이다.
오늘은 뒷 터에 구덩이를 파고 호박을 심었다. 산책 겸 마을을 한 바퀴 돌다가 어느 집 담장아래 심어 놓은 호박모종을 보고 또 시기를 놓칠세라 서둘러 심고 나니 큰일 한 가지를 해 낸 것 같아 오늘 하루도 즐거웠다.
심고 가꾸는 일도 즐거움이고 초록으로 바뀌는 산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움이고 개울가에 엎드려 세상모르고 쏘다니는 물 속의 송사리떼들을 들여다보는 것도 내게는 남모를 즐거움이다.
이제 한 삼 년 지나니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많이 바뀐 것 같다. 처음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 집을 짓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가족이나 형제들까지도 강 건너 불처럼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집을 짓느라 삼백리 먼 길을 힘들게 쫓아다닐 때까지도 사람들은 나를 의아해하고 의심했지만 나는 한 생각만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결행했었다. 그렇게 집을 짓고 아내와 함께 들어온 그해 늦가을 어느 문학단체에서 내 집을 방문했는데 그때 오신 분들이 피력한 소감 중 오래오래 내 가슴에 남는 두 분의 말씀이 있다.
한 분은 "유배지 같다"고 했고, 한 분은 "속진을 씻을만한 곳"이라고 했는데, 두 분의 말씀이 어찌나 내 마음을 울렸는지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그렇다. 참으로 정곡을 찌른 말씀이었다. 정들어도 떠나고 싶고, 떠나면 돌아가고 싶던 이곳이야말로 내 최초의 유배지였고, 또 남은 생의 내 마지막 유배지가 아닌가.
무지와 가난과 힘든 노동뿐이었던 절해의 고도, 그것을 견디지 못해 도망치듯 떠났던 곳이 이곳 아니던가. 사람들은 "뭣 하러 산골로 들어가느냐", "뭣 하러 산골로 들어오느냐"고 하지만 세상은 따지고 보면 어디나 같은 곳.
여기가 저기고 저기가 여기 아닌가. 가는 곳 마다 고통이 있고, 닿는 곳마다 아픔이 있어, 유배지 아닌 곳이 어디 있는가. 목숨이 있는 한 생사의 고통이 없는 곳은 없다. 세상은 근원적 유배지이고 그것이 사바세계 아닌가. 예토(穢土)를 떠나 정토(淨土)가 없듯, 한 생각 뒤집으면 유배지야말로 속진을 씻을만한 곳이 아닌가.
봄을 찾아 들녘을 헤매 다니다가 지쳐 돌아와 보니 뜰 앞에 매화 한 가지가 피어 봄이 거기 있었던 것처럼, 돌아와 바라보니 내가 찾던 그 자리가 본래 자리인 것을, 수고로이 헛바퀴만 돌았음이 아닌가. 달빛 아래 환한 배꽃과 소쩍새 울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김 연 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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