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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이 흐르는 풍경] 풍경과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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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모처럼 시간을 내어 일상의 쳇바퀴 밖으로 탈출하였습니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눈부신 신록의 물결이 차창으로 밀려와 온몸으로 흘러들었습니다. 연초록 물감을 분수처럼 마구 뿜어대는 나무들, 씻은 듯 깨끗한 잎사귀마다 맑은 햇살이 까르르 웃으며 쏟아져 내리고, 바람의 혓바닥에 맨몸을 맡긴 산등성이는 마치 거대한 초록 짐승처럼 살아 꿈틀거렸습니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는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 한 구절을 찡하게 떠올리며, 오월의 풍경 속으로 달렸습니다. 1시간쯤 헤맸을까, 길은 점점 좁아지고 길섶의 나무들이 바로 가까이서 파란 손을 내밀었습니다. 야트막한 재를 넘어서니, 산자락 끝에 작은 학교 건물이 납작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 옛날 내가 다녔던 시골의 초등학교가 생각나 교문 안으로 핸들을 꺾었습니다.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교정, 현관 입구에 무인경비시스템 센서가 침입자를 보자 빨간 눈을 깜박였습니다. 구석구석에서 저들끼리 피어 반짝이는 작은 꽃들에게 차례로 웃음을 던져주고, 운동장 가로 늘어선 느티나무들을 사열하며 혼자 거닐다 보니 문득 교문 높이 걸려 있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학교 폭력 자진 신고 기간」

'학교 폭력 자진 신고 기간이라. 조금 전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본 교실에 아이들 책상이 대여섯 개씩 놓여 있던 걸 보면, 한 학급 아이들이 고작 열두서너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이건 미담이건 담임선생님이 주머니 속 동전 헤아리듯 꿰고 있을 것 아닌가. 설사 담임선생님이 이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잠시 잠깐의 면담으로도 그 실태를 금방 알아 볼 수 있을 텐데, 자진해서 신고하라니? 도대체 누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고 저 현수막을 내걸었나? 어린 시골 아이들은 또 등하교 길에 저 현수막을 쳐다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꿜꿜 푸드득!" 맞은 편 산등성이 푸른 숲에서 꿩이 날아오르는 소리를 좇아 고개를 드니, 파아란 하늘에 구름 몇 점이 한가롭게 놀고 있었습니다. '삶의 품안으로 파고들지 못하는 저 현수막의 글귀가, 어쩌면 이 신록에 파묻힌 시골 학교의 평화로운 풍경에 상처를 내는 폭력이 아닐까' 씁쓰레한 생각을 접으며 교정을 빠져나와 다시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인간도처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이라. 가는 곳마다 자연은 그 어떤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한바탕 생명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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