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모닝콜 소리에 눈을 뜨는 아침이다. 간밤의 과음 탓인지 산모처럼 얼굴이 푸석하다. 쓰린 빈속에다 정신없이 들이켠 냉수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다. 회사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화장대 앞에 앉는다. 언제나 낯선 얼굴이 거울에 비친다.
매일 아침마다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꾼다. 스스로에게 붙인 별명이 하나 있다. '꿈꾸는 암퇘지'라고. 왜 그런 별명을 자신에게 부여했을까. 내 자신의 무의식 속에 시간으로부터, 직장으로부터, 아니면 가족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꿈처럼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변신을 꿈꿀 때마다 한 마리의 벌레처럼 버둥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뿐이니까.
옷장 문을 열자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상자가 발등에 떨어진다. 티벳에서 찍은 사진들이 흩어진다. 새 앨범을 사면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픔도 잠시 잊고 몇 장의 사진을 주워든다.
눈 덮인 설산을 배경으로 한 호숫가 사진과 천여 개의 방이 있다는 포탈라 궁전, 티벳 최고의 성지인 조캉사원 앞에서 오체투지하는 순례자들. 기도문을 적어 놓은 회전식 기도원통…. 어느 날 나는 낯선 땅에서 이방인이 되어 냄새나는 야크 등에 올라타서 웃고 있다.
또 다른 나의 모습에 코끝이 시큰해진다. 누구나 아련한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가끔은 외롭고 힘들거나 주저앉아버리고 싶을 때 추억은 힘이 되곤 한다.
지난 여름 휴가 때의 일이다. 고산병을 핑계로 중국 성도에서 티벳의 수도 라사까지 가는 방법 중 버스를 선택했을 때부터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 자신의 삶에 그것은 항상 꿈꾸던 일탈이었다.
성도에서 출발해서 깡띵·참도·빠수·닝트리 등의 마을을 거쳐 라사에 도착한 것은 7년이 아니라 7일 후였다. 버스가 없는 마을은 중간에서 트럭을 타기도 하고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사원에 가서 야크 우유를 얻어먹기도 했다.
한밤중에 한 마을에 떨어지면 다음 버스는 없었다. 그 마을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그 버스를 타야 했다. 우리나라 여인숙보다 더 허름한 숙소에는 세수할 물도 없었다. 겨우 얻은 물은 흙탕물이었다.
대충 씻고 자리에 들었으나 철 지난 솜이불보다 못한 이부자리는 물론 흙벽 그대로인 방벽에 혹시 흙이 묻을까봐 잔뜩 웅크리고 뜬눈을 새웠다. 그러나 그런 불편함은 7일간의 여행에서 얻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원주민과 같이 어울려 탄 버스로 몇 시간을 달려도 질리지 않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초원 때문이었다. 이름 모를 들꽃 속에 야크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깊은 계곡과 칠십 여개에 이르는 고갯길 앞에서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황혼으로 물든 히말라야가 멀리 보이던 그곳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았다.
추억이란 각자의 소중한 기억이다. 그렇지만 흐르는 강물처럼 지나간 추억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난 아직도 많은 추억을 남길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남보다 더 오래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얼마나 자신의 삶에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행동을 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등반가 하인리히 하러가 티벳에 머물렀던 7년간의 체험을 담은 회고록을 바탕으로 쓴 베키 존스 톤의 '티벳에서의 7년'이라는 소설 속에 인상 깊은 대목이 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여행은 곧 자신을 발견해 가는 모험 속에 있다."
박은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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