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하반기의 대구에는 학원과 노동현장에서도 크고 작은 맹휴와 파업이 속출했다. 한더위를 고비로 이런 갈등과 불안요소는 더욱 고조되지만 '뜨거운 감자'는 사실 이 해 늦봄부터 이미 미군정치하의 사회저변 곳곳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대구의 사회가 이 무렵 얼마나 피폐하고 처참했냐는 단적인 예로, 대구의 한 주간신문('民論')에 이런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미군에 부끄럽다. 달성공원 자살사건'이란 제하의 이 기사는 일본에서 귀환한 연고 없는 한 50대 남자가 생활고를 못 이겨 공원의 소나무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생활고로 인한 자살사건은 이 무렵 흔해빠진 뉴스였다. 문제는 이 자살한 사체를 처리하는 과정에 있었다. 5월21일 아침 6시쯤, 순찰 경관이 목메어 자살한 현장을 발견하고 본서에 보고하자, 검사와 서원 3명이 나와 검시한 후, 대구부(시) 당국자에게 사체처리를 통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건 발생 10시간이 지난 오후 4시까지 나뭇가지에 목이 메여있는 그대로 사체를 방치함으로써, 사회안전망이 얼마나 엉망이었나를 반증했다.
사체가 오랫동안 메 달려 있자 인근의 개들이 몰려와 짖어 대고, 파리 떼가 달라붙는 처참한 광경을 보인 것도 문제였다. 게다가 마침 공원을 산책하던 미군이 이 기이하고 엽기적인 광경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 것이 더 문제였다. 촬영모습을 본 군중의 반응은 두 갈레였다. "이것이 무슨 추태인가, 미국인들이 나중 사진을 보면 우리민족을 어떻게 평할까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고 울분을 토하는 한 무리가 있었다.
반면에 "차라리 잘 되었다. 저런 광경을 미국인들이 더 많이 봐야 원조를 더 해주든지 쌀 배급을 더 해줄 것 아닌가"하는 역반응도 나왔다. 하긴 대구사회의 하층민뿐만 아니었다. 이 무렵 경성(서울)중학교 교사였고, 촉망받던 소설가였던 황순원(黃順元)도 "월급 1830원으론 일곱 식구가 쌀밥을 먹어본지는 오래고, 밀기울조차 먹기 힘들다"고 신문('독립신문' 1947년 2월1일)에서 하소연하고 있었으니 지방도시 무직자의 참상은 말할 나위 없었다. 좌익은 이런 암담한 현실을 기가 막히게 풍자하여 심신이 병든 민중들의 공감을 샀다.
* 하루 종일 정거장 (장시간 연발 연착하는 철도사정)
* 흐지부지 우편국 (분실 배달지연에 무책임한 우편행정)
* 먹자판의 재판소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이 극심했던 법조)
* 깜깜절벽 전기회사 (단전이 보통인 남한의 전력사정)
* 종이쪽지 세무서 (비리만발 속의 고지서남발)
* 가져놔라 면사무소 (수매와 부역 속의 오라 가라는 면 행정)
* 텅텅 볐다 배급소 (허울뿐인 쌀 배급 실태)
* 고드름 장작 때고 냉수 먹세 (이래저래 멍든 민심 기대도 버리자는 후렴)
이 같은 현상은 수십 년 뒤까지 크게 개선되지 않은 남한의 고질적인 사회병리였다. 우익은 좌익의 이런 따끔한 풍자에 뒤쳐졌다. 고작 내 논 것이 '38 아리랑'정도였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는 38도 고개,) 공산(共産)은 빌 공(空)자 공산인가, 쓸만한 세간사리 다 가져 가네.(1절)
* … 전문대학을 가르쳐 놓으니 아버지 보고서 동무라 하네.(2절)
* … 농민노동자를 살린다더니 목매기송아지 다 가져가네.(3절)
* … 자유 독립을 시킨다더니 신탁지지가 왼 말인가.(4절)
* … 38도 해결이 안 된다면 기미년 혁명이 또 오리라.(5절)
풍자싸움에서야 누가 이기든, 허기진 민초들로선 당장의 한 끼 밥이 눈앞에 절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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