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위대한 조각가다. 나는 파도의 조각품이다. 파도가 바닷가의 바위를 새기듯 어릴 때의 물결소리가 내 표정을 새겼다. 이것이 내 인생의 표정이 되었다. 한 친구가 나에게 해암(海巖)이란 아호를 권한 적이 있다. 나는 섬의 바닷바위 위에 석상처럼 설 것이다.
돌아가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는가. 그림을 그리리라. 고향의 미화(美化)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겠는가. 나는 알프스 산맥의 몽블랑도 그려왔고 융프라우도 그려왔다. 어릴 적 물갓집의 벽에 걸렸던 '시용성' 그림의 배경이 알프스 산맥이었다. 이 눈 쌓인 고봉들을 물가에 갖다놓고 이제 바다를 그리리라. 섬을 떠난 나의 출유(出遊)는 위로 위로의 길이었다. 나는 표고 4000여m까지 상승한 증표를 가지고 도로 바다로 하강한다. 어느 화가가 내 서툰 그림의 과욕이 걱정되는지 바다를 잘못 그리면 풀밭이 된다고 했다. 그런들 어떠랴. 바다는 나의 대지(大地)인 것을.
해면을 떠나면서부터의 나의 등고(登高)는 이륙이었고 이제 착륙한다. 인생은 공중의 곡예다. 해발 0m에서 출발한 나는 해발 0m로 귀환한다. 무(無)에서의 시발이었고 무로의 귀결이다.
인생은 0이다. 사람의 일생은 토막 난 선분(線分)이 아니라 원(圓)이어야 한다. '자기 인생의 맨 마지막을 맨 처음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한 괴테는 나를 예견하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와 자신이 태어난 방에서 입적한 석가의 제자 사리불(舍利弗)처럼. 그것은 원점으로 회귀하는 일이다.
나는 하나의 라스트신을 상상한다.
한 사나이가 빈 배에 혼자 몸을 싣고 노를 저어 섬의 선창을 떠난다. 배는 돛도 없고 발동기도 없고 정처도 없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아무 것도 싣지 않았다. 한바다로 나간 뒤에는 망망대해뿐 섬도 육지도 보이지 않는다. 이 배의 최후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빈 배라도 띄울 선창을 나는 찾아간다.
물결은 정지하기 위해 출렁인다. 배는 귀향하기 위해 출항한다. 나의 연대기(年代記)는 항해일지(航海日誌)였다.
아호(雅號) : 문인, 학자 등이 본이름 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
출유(出遊) : 다른 곳에 나가서 놂.
등고(登高) : 높은 데 오름.
시발(始發) : 맨 처음 출발하거나 발차함.
귀결(歸結) : 행동 따위가 어떤 결론에 이름.
연대기(年代記) : 역사상의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
김성우(1934~)
언론인. 경남 통영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한국일보 파리총국장과 편집국장, 주필 등을 역임. '돌아가는 배' 등 저서 다수.
아무리 평생 글을 다루고 살았다고 해도 도저히 신문 기자가 썼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미문(美文)이다. 무수한 사건과 세계의 풍파를 겪었다고 해도 이렇게 심금을 울리는 글을 쓰려면 도대체 어떤 공을 쌓아야 하는지 궁금증을 떨칠 수가 없다.
삶의 긴 여정을 정리하면서 고향 섬과 바다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이가 쓴 글답게 문장마다 절절하면서도 여유가 있다. '젊은 시절 수천 개의 돛대를 세우고 배를 띄운 그 항구에 늙어 구명보트에 구조되어 남몰래 닿더라도 귀향하리라.'면서도 '빈 배에 내 생애의 그림자를 달빛처럼 싣고 돌아가리라.'는 식이다.
그 속에 어떤 설레임도 엿보인다. 젖내음처럼 향기로운 갯내, 눈물겹도록 시린 해풍의 청량함, 한 움큼 떠서 마시면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은 바닷물. 고향 섬과 바다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이보다 더 간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딱딱한 철학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솜씨도 놀랍다. 스스로 체화시켜 두지 않았다면 제풀에 어색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기회가 된다면 1999년 '삶과꿈' 출판사에서 나온 책 '돌아가는 배'를 구해 커피 한 잔 옆에 두고 한 줄 한 줄 음미하길 권한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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