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뛰어난 문인 예술가 중에는 기인(奇人)이 참 많았다. 10여년 전 '대구예술'에 '기인이 그리운 세상'이란 주제의 글을 연재했던 김원중 시인은 "위대한 문학과 예술을 창조했던 기인이 없었더라면 우리 삶이 얼마나 삭막해졌을까"라고 되물은 적이 있다.
당대의 기인들. 무엇이 그들을 술집거리로 내몰았으며 그토록 취하게 했을까. 그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 문학이란 이름을 위해 온몸을 내던지며 그토록 아파했을까. 대구문단에 얽힌 기행과 파행의 비망록에는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지식인의 고뇌가 흥건히 녹아있다.
세계화다 정보화다 하여 상품화되고 규격화된 사람들만 득실거리는 오늘일수록 기인이 더 그리워지는 것은 인지상정인가. 박훈산·정석모·최광열·최해운·이재행·전재수·서석달·박용주·김윤식·김정환·이우출·금동식·조기섭,권기호,송일호,이수남....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몇몇이 문단의 원로로 남아있는 그들도 이제는 아스라한 그리움으로 남았을 뿐이다.
50년대 향촌동 거리의 터줏대감이었던 박훈산(朴薰山·1919~1985) 시인. 그의 기인적인 행보는 60·7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큰 체구만큼이나 발도 컸다. 보트만한 신발을 신고 거리를 표류하는 모습이 난파선에 비유되곤 했다.
오죽했으면 남일동 유곽의 한 아가씨가 배만한 신발을 보고 기겁을 해서 화대를 도로 내어놓은채 줄행랑을 쳤을까. 그러나 젊은 시절 박훈산은 훤칠한 키에 미남형 용모로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5·16이 일어나던 날 아침 유곽에서 머물다가 계엄군에 붙잡혀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5·16은 그에게 문단 안팎의 상당한 권력(?)을 선사했다. 62년 출범한 예총 경북지부의 초대 사무국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우인 박훈상도 김춘수 예총 지부장 시절인 60년대 후반 사무국장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박훈산은 그러나 어쩔수 없는 나그네였고 낭인이었다. 청도의 명문가 후손이었으나 고향에서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고, 문단에서도 인심을 잃었다. 그러나 랭보와 릴라당이 그랬듯이, 천상병과 김관식이 그랬듯이, 독특한 시인적인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용인되었다. 그 시대는 그런 보헤미안을 포용할 수 있었다.
60,70년대 대구문단을 풍미한 기인으로 정석모(鄭夕茅·1922~1987) 시인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취중폭언은 아무도 못말렸다. 술에 취하면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독설을 퍼부었다. 자신을 문단으로 이끌었던 청마 유치환도 안중에 없었다.
"야, 이 속물아", "야, 이 어용놈의 ××들"이라며 상대방이 듣기 거북한 폭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술 실컷 받아주고 욕만 얻어 먹기 일쑤였다. "신동집은 심술꾸러기이고, 김춘수는 애살스럽다."는 식의 어투는 점잖은 편이었다.
정석모는 호주머니가 궁하면 문인들에게 돈을 빌렸다. 당시 뚜렷한 직장을 가진 문인이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이었으니, 빌려보았자 막걸리 한 되 값과 반월당에서 고산에 있는 집까지 가는 버스비면 충분했다.
63년 가을, 중앙통 나그네 다방에서 당시 원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김원중 시인을 만난 정석모는 시화전을 한다며 학교 문예반 액자를 빌려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렇게 해서 액자 스무개를 빌려갔는데, 시화전이 끝난지 한 달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알고 보니 액자를 모두 중앙파출소 인근 유리가게에 팔아버린 것이었다. 학교 액자값 변상에 반달치 월급을 날려버린 김원중은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동성로 거리에서 우연히 정석모를 만났는데, 연신 미안하다며 다방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커피값을 내는 것 까진 괜찮았다.
다방을 나오면서 정석모가 하는 말인 즉, "김형! 집에 가는 버스비 좀 빌려 주소."였다. 일본 시마네현에서 출생한 유학파인 그는 기타 반주에 실은 일본노래가 일품이었다. 애조띤 정석모의 노래는 주위를 매료시키는 마력을 지녔다. 사실 그는 웃을 때 손으로 입을 가릴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문학에의 꿈과 현실의 고달픔이 가져온 괴리가 그를 취하게 만들었고, 삶과 시대의 울분이 그의 만행을 자아낸 것일까. 조기섭 시인은 "그는 세속과 더불어 살기에는 반역의 피가 너무도 뜨거운 데카당스였다."고 회고 했다. 작가 윤장근은 "주위 문인들에게 애도 많이 먹였으나 근본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바늘 끝만치/ 귀뚜리 갈빗대도 닳아버린/ 세상에// 豫感(예감)-/ 꼭 무슨 기별이 올 것만 같은/ 마리아의/ 그때의 그 두 볼// 사랑이 아니면/ 입김이 아니면...// 몸체로의 對答(대답)이 지레 피어난 것이다.'
칠곡군 지천면 청구공원 묘지 시비에 새긴 정석모 등단작 '능금 두벌꽃'이란 시다.
파란의 피란시절을 대구에서 보냈던 자칭 국보(國寶) 양주동 박사도 70년대 초 어느 주말 KG홀(현재 시민회관 건물 자리에 있었던 KBS 대구방송국홀)에서 국보(?)다운 일화를 남겼다.
이날 양주동 박사의 초청 강연회에 이어 국문학자 조연현 교수와 신동집 시인 등 세사람이 참석한 좌담회가 열렸는데, 문제는 좌담회 출연료 8천 원 때문에 일어났다. 8천 원을 세사람이 어떻게 나누어 가져야 할지가 난감한 일이었는데, 국보 선생이 "내가 3천 원을 갖고 두 사람은 2천500원씩 갖도록 하자."는 제안을 했다.
세 사람 가운데 자신이 좌담회에서 이야기도 가장 많이 했고, 나이도 많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장난기가 발동한 조연현 교수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누가 선생님 보고 말씀 많이 하시라고 했습니까. 연세 많이 드시라고 했습니까."라는 반격에 천하의 국보 선생도 말문이 막혔다는 후문이다. 물론 나중에는 양주동 박사를 예우(?)해서 배분을 했다고 한다. 김원중 시인이 조연현 교수와 신동집 시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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