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癖(벽)과 중독

사람에겐 저마다 유난히 이끌리는 것이 있다. 무언가를 좋아하여 즐기는 상태는 '樂(낙)'이다. 그러나 그 즐김이 지나치면 '癖(벽)'이 된다. 미친 듯 빠져드는 감정적 몰입 상황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朴齊家(박제가:1750~1805)의 '百花譜序(백화보서)'에 나오는 꽃에 미친 '金君(김군)'의 이야기도 한 예다. 김군은 눈만 뜨면 꽃밭으로 달려가 하루종일 꽃만 보는 사람이었다. 시간에 따른 꽃의 변화상을 쉴 새 없이 관찰하고 그림에 담았다. 손님이 와도 꽃 피는 모습을 놓칠까봐 말도 시키지 말라는 표정으로 꽃만 바라보니 주변에선 실성했다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미친 듯한 열정이 '百花譜(백화보)'라는 책을 낳았다. 계절별 꽃의 모습을 細密畵(세밀화)로 기록한 화첩. '金君(김군)'은 조선 고종 때의 학자 劉在建(유재건:1793~1880)의 '里鄕見聞錄(이향견문록)'에 '金德亨(김덕정)'이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실학자 李德懋(이덕무:1741~1793)는 못 말릴 책벌레였다. 동'서'남으로 창이 난 방에서 해를 따라 방향을 바꿔가며 밤낮 책만 읽었다. 세상물정엔 관심도 없고 심지어 춥고 더운 것, 주리고 병든 것조차 무관심한 그를 사람들은 '책만 읽는 멍청이' 즉 '看書痴(간서치)'라 불렀다.

무언가에 미치도록 탐닉하는 '癖(벽)'을 가진 사람들은 東西古今(동서고금) 이래 수없이 많다. 요즘 말로 바꾸면 슈퍼 마니아, 울트라 마니아라고 해야 할까. 그들의 취향은 매우 독특하고 더러는 하도 이상해서 엽기 수준의 것도 적지 않다. 개인 차원에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온 나라를 광풍처럼 뒤덮을 때도 있다.

17세기 유럽을 휩쓴 튤립 열풍이 그러했다. 16세기 초 네덜란드와 독일의 부유층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튤립은 17세기 초 영국에서는 튤립을 키우지 않으면 교양 없는 사람으로 치부될 정도가 됐다. 드디어 그 열기는 중산층으로 번졌고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조차 비싼 값에 튤립을 사느라 법석을 떨었다. 단순히 자랑하고 싶어 전 재산의 반을 털어 튤립 한 뿌리를 산 사람도 있었다.

1635년 네덜란드에는 튤립 40뿌리에 10만 플로린에 거래되기도 했다. 당시 황소 4마리가 480플로린이었으니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이었다. 굴뚝 청소부까지 튤립 투기에 나설 정도가 되자 너도나도 집과 토지를 팔아 튤립을 샀다. 하지만 부유층들이 정원의 튤립을 싼값에 팔기 시작하자 튤립 값은 떨어졌고 파산자들이 속출했다. 튤립 광풍은 종막을 고했다.

'빨리빨리' 기질 때문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무엇인가에 잘 빠져드는 것 같다. 대개는 부정적이고 병적인 종류들이라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게다가 집단적 사회 현상으로 나타날 때가 적지 않다.

예컨대 요즘 방방곡곡에 난립한 사행성 성인오락실은 우리사회의 뿌리 깊은 도박벽을 드러내 준다. 겉으로는 배당금으로 상품권을 받는 합법적 공간이지만 주변에 상품권을 현금으로 몰래 바꿔주는 교환소를 두고 있어 사행심을 부추기고 있다. 도박 중독에 빠진 사람들이 부지기수고, 수많은 가정이 부서져가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전국 12개 시'도의 94개 초등학교 학생 7천700명을 대상으로 정신건강 선별검사를 한 결과도 우리를 걱정스럽게 한다. 인터넷 과도 사용으로 인터넷에 중독됐거나 중독될 가능성이 있는 학생이 26.2%나 됐다. 초등학생 4명 중 1명이 정서'행동장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과 관련이 없다 할 수 있을까.

'미치지 않으면(不狂) 미칠 수 없다(不及)'고 한다. 하지만 제대로 잘 미쳐야 한다. 같은 물도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마시면 독이 되듯. 時俗(시속)을 초월해 정신의 날을 벼리는 '癖(벽)'은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中毒(중독)'은 자신과 사회를 병들게 한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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