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남 산청 남명 조식 발자취를 찾아서

풀 먹인 삼베옷같이 빳빳하게, 좀체 꺾일 줄 모르는 더위에 지쳐서일까. 가슴이 답답했다. 머리는 더 혼란스럽다.

국가안보와 직결된 전시작전통제권을 두고 시끌벅적하다. '환수'와 '시기상조론'이 맞물려 명분과 현실의 두 대척점이 찜통더위만큼이나 뜨겁다. 이 땅에 사는 사람치고 의식 밑바닥에 '만약 전쟁이…'라는 조건명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이래저래 상념의 갈피를 떨칠 요량으로 훌쩍 길을 나섰다.

언제가 읽었던 칼을 찬 유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 칼과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늘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방울소리를 들으며 흐트러지기 쉬운 마음을 수습했고 칼에는 '內明者敬(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外斷者義(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다)'라는 패검명을 새겨 스스로를 깨어있게 했다.

이런 남명이 말년에 후학들을 가르치며 지리산 자락 산천경계를 벗 삼아 홀로 칼의 노래를 불렀던 경남 산청군. 지리산 영봉들이 둘러싸여 있고 곳곳에 수려하고 청정한 계곡과 강이 흐르는 이 곳은 맑은 땅의 기운을 받아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정신은 놀되 칼날은 놀지 않는다

지리산 천왕봉 동남쪽 덕천강이 유유히 흐르는 터에 자리한 남명조식 유적지 가는 길은 8월의 뙤약볕 아래 벼가 익어가는 결실의 풍경이 이어진다.

산청군 시천면 원리 남명 기념관. 성성문을 지나 너른 앞뜰의 잘 정돈된 파란 잔디가 시원한 색채감을 선사한다. 왼편에는 정갈한 한복차림의 남명 동상이 천왕봉을 뒤로 한 채 서 있다.

유적해설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기념관 입구에 걸린 신명사도(神明舍圖)가 강한 인상을 준다. 재야 산림에 있을지언정 왜곡된 현실에 맞서 시대의 양심을 지켰던 남명이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처신을 반듯하게 한 그의 경의사상을 그린 것으로 당대 지식인의 철저한 자기관리의 의지이다. 경과 의는 자기성찰과 결단을 평생의 숙명처럼, 칼날 같은 삶을 살았던 남명을 떠 받쳤던 두 기둥이다.

신명사도에 이어 본격적인 전시실에서는 그의 생애와 학문정신이 대형 판넬과 저서, 유품, 글씨와 함께 부연 설명된다. 고고한 선비의 기개가 답답했던 가슴을 훑어낸다.

한편 전시실이 자리한 일대는 남명이 환갑을 넘긴 후 후진양성을 위해 고향인 합천 삼가면에서 옮겨와 72세를 일기로 운명할 때까지 살았던 곳. 기념관 옆에 있는 여재실(如在室)은 그래서 남명의 가묘(家廟'문중에서 제사 드리는 장소)이다. 그와 두 부인인 정경부인과 숙부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여재실 뒤편 동산에 남명의 묘소가 있다.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지리산을 닮고자

기념관에서 길 하나 건너면 시천면 사리에 남명의 개인서실이었던 산천재(山天齋)가 있다. 지리산 천왕봉 산줄기를 따라 80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천재는 회룡고조(回龍顧祖'산의 지맥이 빙 돌아 본산과 서로 마주함)형의 풍수지리적인 특성을 안고 있다.

이 때문에 작고 단아한 3채의 가옥인 산천재는 실제로 천왕봉을 주된 건축물로 삼고 서실은 부속건물이 되는 형상이다. 남명의 기개와 학문적 기상이 천왕봉마저 마음속의 서실로 삼은 탓이겠다. 앞 뜰에는 남명이 심은 매화나무 남명매(南冥梅)가 그윽한 자취를 뿜어낸다. 특히 산천재 편액 위에는 희미하지만 은자가 바둑을 두며 차를 다리는 모습과 밭가는 풍경, 장자에 나오는 허유과 소부가 영수에서 귀를 씻은 고사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남명매 한 가지 끝에 서니 저 멀리 천왕봉이 허리춤에 구름을 두르고 그 뾰족한 봉우리를 내밀고 있다.

'봄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春山底處無芳草)/하늘 가까운 천왕봉이 마음에 들어서라네(只愛天王近帝居)/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을까(自手歸來何物食)/십리은하 같은 물, 먹고도 남으리(銀河十里喫猶餘)'

벽화와 덕산(시천면)에 터를 잡은 감회를 읊은 시에 담긴 남명의 맑은 기상이 혼란스런 머리를 씻어내는 청량제가 된다.

◆바위에 새긴 영원한 선비정신

남명은 생전에 지리산을 12번이나 올랐다고 한다. 이 중 단성면 백운동 계곡은 남명의 지리산 등정 흔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

웅석봉에서 내려온 산자락이 길게 뻗어 나와 덕천강으로 계류를 쏟아내는 백운동 계곡은 백운폭포와 오담폭포, 물살이 하늘로 오른다는 등천대가 이름 난 곳이다. 특히 청정한 지리산 자락 맑은 물이 하얀 너럭바위와 기암 사이를 곡예하듯 흐르며 낙류와 소를 만들어 내고 있다.

마치 '죽은 듯이 있다가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침묵하다가 우뢰처럼 소리를 낸다.'는 남명의 좌우명처럼 너른 소에서 조용히 머물던 계류가 큰 바위를 만나 낙류를 이룰 땐 그 소리에 계곡이 쩌렁거린다. 남명은 이 같은 백운동의 계류 흐름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으리라.

계곡 입구에서 30여 분 오르면 남명이 썼다는 백운동(白雲洞), 용문동천(龍門洞天)이라 글씨가 있어 이를 찾아보는 것도 재밋거리이다.

남명 사후 4년 뒤(1576년) 후학들이 세운 덕천서원은 정갈하고 단아한 서원배치에서 은자의 은은한 기품이 배어난다. 서원 곳곳에 심어진 백일홍 나무에서 붉은 꽃이 막 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다. 가을에 열리는 향례(매년 봄, 가을 두 차례)즈음엔 백일홍이 만발한다. 선비의 붉은 마음처럼, 흔들리지 않는 단심을 피우듯이. 서원 앞 세심정에 서니 발아래 덕천강이 한가로이 흐른다.

◇남명조식유적지 가는 길=88고속도로 함양 분기점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로 빠져 진주'방향으로 가다가 단성 IC로 빠진다. 톨게이트를 나오자마자 우회전, 덕천강변을 따라 20번 국도를 따라 계속 가면 남명조식유적이 나온다. 덕천서원은 이곳에서 차로 10분 이내 도로변에 있다. 도중에 오른 편에 백운동 계곡으로 빠지는 작은 도로가 보인다.

▩주변 볼거리

▶남사예담촌=남명조식유적지 가기 전 들과 숲이 천혜의 경관을 이루는 곳에 있는 남사예담촌은 조선개국 공신 이제(李濟'이성계 셋째사위)의 고가를 비롯한 최씨고가 등이 남도지방 양반가의 유풍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특히 이 곳은 고풍스런 옛 돌담 정취가 뛰어나다.

600년 된 감나무, 700년 된 매화나무와 망추정, 초포정사도 전통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삼우당목면시배 사적관과 지리산겁외사=삼우당목면시배 사적관은 문익점 선생과 그의 장인 정천익의 목화재배 공적을 기념한 곳으로 단성IC에서 우회전하자마자 나타나며 지리산 겁위사는 성철대종정의 생가에 세운 절로 가람 마당 한 가운데 그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글·사진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작성일: 2006년 0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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