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의 숙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파리를 잡아 성냥갑에 채워가는 것이었다. 한 마리도 놓칠세라 파리채를 들고 마루와 부엌을 오가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느 해에는 전국적으로 쥐를 소탕한다는 정부의 방침으로 쥐를 잡아 꼬리를 잘라 오라는 숙제도 있었다. 잘 사는 나라의 Tom과 Judy가 나비와 다람쥐를 쫓으며 공원을 뛰놀 때 '영이와 철수'는 파리를 잡고 쥐를 쫓으며 유년을 보낸 것이다.
모두 어렵고 가난한 때였다. 어느 친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봉제공장에 취직했고, 어느 친구는 신발공장으로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났다. 회사에서 주는 간식과 점심으로 끼니를 때우며 모은 돈을 꼬박꼬박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그 돈으로 동생들 뒷바라지도 하고, 논밭도 사고 그렇게 집안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지금은 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아득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60년대와 70년대 우리나라 시골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사회적 풍경들이었다. 불완전한 근대를 거치고 뒤돌아 볼 틈도 없이 산업화·서구화라는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려온 한국 사회의 모습 또한 이 땅에 사는 개인의 성장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모두 진주처럼 겉모습은 화려해도 속으로는 성장의 아픔과 부조화를 안고 있다. 힘들었던 보릿고개도 경제개발과 민주화 시대도 숨 가쁘게 넘기고 마침내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오로지 잘 살기 위해서였다.
요즘 흔히 뜨고 있는 웰빙(Wellbeing)이란 말도 우리식으로 거칠게 풀이하면 잘 먹고 잘 살자는 뜻이다. 잘 산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함께 평화로울 때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잘 사는 일이 오로지 잘 먹고 마시는 일에만 집중된 듯하다.
어디를 가도 술집과 음식점은 즐비한데 문화와 예술을 즐기고 소비할 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동안 가난해서 잘 먹고 잘 놀지 못한 탓일까? 80년대 말부터 경치 좋은 숲과 강변에 러브호텔과 음식점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식욕과 성욕의 분출은 잘 먹고 잘 놀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자체가 훌륭한 놀이이자 여가활용이었다.
육체적인 소비는 소비방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는 본능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화와 예술은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문화적 안목과 학습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현대판 요술상자인 컴퓨터에는 세상의 온갖 정보가 내장되어 있다.
마치 알라딘의 램프 속의 지니처럼, 주문만 외우면 튀어나와 주인에게 온갖 것을 제공한다. 문제는 램프 속의 지니를 불러내는 주문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시대의 '영희와 철수'는 예술을 소비하고 즐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영희와 철수'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초상이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라는 그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졌다. 어느덧 장년에 접어들어 자식들도 출가시키고, 골프도 치고, 자가용도 굴리는 생활의 여유가 생겼다.
풍요로운 경제와 세계화의 초석을 다진 이 땅의 주역들이지만, 억척같이 살아오는 동안 자신을 가꾸고 스스로의 격을 높이는 일에는 익숙지 못했다. 경제를 일궈냈듯이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고 그때의 '또순이'와 같은 정신으로 이젠 자신의 삶의 질을 업그레이드할 때다.
가을이 깊어간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자. 지난 여름 무더위와 마음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한결 부드러워진 풀빛과 벌레소리를 들으며 삶의 곳간에 문화의 향기로 가득 채우자. 몸과 마음이 조화로운 평화로운 삶을 위하여.
김갑수(화가·포항예술문화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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