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사랑하는 벗이여! 한 인간의 존재란 보잘것없는 것, 정말 보잘것없는 것임을 나는 분명히 알았네.'(J.W.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2년 10월 26일자 편지 중).
나의 책상 위에 어느덧 가을의 상념들이 쌓여간다네. 자네의 뜰에도 생의 연민이 낙엽처럼 부지런히 쌓여가겠지. 이제 곧 바스러질 그 소리에 초조해 하며, 한 사내의 절절한 사랑이 나의 가을을 이리도 무너지게 하는 까닭은 정말 시간의 엄격함 때문만일까.
우린 너무나 많은 것을 잊고서 살아왔네. 까까머리 학생 시절 녹슨 양철지붕 아래서 혹은 판잣집 골방에서 30촉 알전구 속으로 타들어 갔던 문학의 열정을, 철학의 시시비비를, 그리고 L.P판 한 장으로 천하의 소리를 얻은 듯한 그 소박했던 젊음을. 까마득한 날의 낡은 초상으로 묻어 버렸네.
하지만 잘 생각해 보게나. 그때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풍족했던 시절이라고 말일세. 내 옆에서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네가 있어 주었고, 책 속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의로움이 무엇인지, 인간에 대한 예(禮)가 무엇인지, 그땐 우리들의 가치관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순수한 열정만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네.
얼마나 가슴이 불타 올랐던가. 자네에게 묻고 싶네. 그 시절 밤을 새워 전율했던 '햄릿'의 달콤한 고뇌의 맛을 어느 한순간 그리움으로 환원시켜 본 적이 있는가를. 아니면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베르테르'의 슬픔이 허기진 가슴팍을 후려치고 지나감을 단 한 번이라도 느껴본 적이 있는가를.
우린 정말 많이도 걸어왔네. 서리진 들판에 홀로 선 것 같은 황량한 외로움에, 세상 끝에 선 듯한 몸서리치는 절박감으로 얼마나 우는 날이 많았던가. 손바닥 넓이의 디딤돌 위에서도 목숨의 굽이친 연(緣)을 잡고 얼마나 탐했었나. 그 욕망의 먼지 속에 삭아가는 젊음과 더불어 모든 것은 하나둘 빛을 바래기 시작했다네. 이제 그 어디에도 '햄릿'은 없고 '베르테르'도 사라져 버렸다네.
오늘 아침 산길을 걸었네. 너무도 평온한 계절이 아닌가 하네. 문득 그때의 자네가 그리워지는 것은 아직 나의 가슴이 살아 뛴다는 증거라고 믿고 싶네. 더 늦기 전에 자네를 찾아 떠나야겠네. 모든 것을 흙으로 되돌리는 가을 숲의 복원력을 온몸으로 전해 받아 망각 속에 숨 쉬는 그들의 푸른 눈빛을 다시 살려냈으면 한다네. 이 순간의 절실함이 나만이 갖는 꿈인지를 자네에게 물어 보고 싶네. 우리는 결코 잊은 적이 없다는 것을. 다만 잠시 접어두었다가 함께 꺼내어 볼 날을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말일세.
아아, 벗이여! 쑥부쟁이의 보랏빛 꽃잎이 저렇게 고울 수가 있는가. 만약 자네의 기억 속에도 저 꽃들의 눈부신 일렁임이 살아있다면, 자네 나를 맞으러 오지 않으려는가.
'농부가 비를 청하듯이 나는 땅위에 엎드려 신에게 눈물을 달라고 기도했었네. 그러나 아아, 내가 그토록 목마르게 갈망했는데, 신은 결코 비도 햇빛도 주시지 않았다네. 이제 되돌아보면 괴롭기만 한 그 시절이 어찌하여 그렇게 행복했을까.'('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2년 11월 3일자 편지 중).
이 병 훈(수필가)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주진우, 김민석 해명 하나하나 반박…"돈에 결벽? 피식 웃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