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찬바람에 나뭇잎이 구르는 거리에 나는 서있었다. 분명히 여기였는데... .
가로등과 손때 묻은 철제난간과 나지막한 계단이 수십년 된 이끼를 이고 사는 마을 어귀는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도시개발로 들어설 아파트의 육중한 몸집을 가리려는 펜스가 두텁게 기억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영화 '말레나(Malena)'를 보면 이탈리아의 낡은 거리가 마음을 잡아끈다. 사실 이태리 영화는 거리의 덕을 많이 본다는 말이 있다. 아무데다 카메라를 갖다 대도 그림이 나온다는 얘기다. 낡은 거리와 집들과 간판은 나름대로 운치있게 사연을 간직한 듯 화면 속에 시정(詩情)을 뿜어낸다.
우리는 거리를 가꿀 줄 모른다. 특히 동성로 입구의 휴대전화 골목을 보면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된다. 전통과 역사와 인간의 사랑이 사라진 비천(卑賤)하고 열등(劣等)한 거리. 부끄럽다. 누구에게 이 곳이 대구의 거리라고 말하기 힘들다.
거리가 아름다우려면 거기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역사와 전통이 오랜 세월 벽과 바닥에 지워지지 않는 때로 인(印)이 박혀야 한다. 영화 '친구'에 나오는 부산의 낡은 거리를 보라. 아름답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영상미는 바로 부산사람의 삶이 완성해 주지 않았던가?
몇 해 전 천년고도(古都) 모로코 뻬즈(Fes)의 구시가를 직접 걸어본 적이 있다. 1천년 이상 개발없이 내려온 그 마을, 미로처럼 얽힌 거리는 걷기만 해도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답다. 부식된 낡은 대문과 흘러내릴 듯한 오랜 담벼락, 더러운 길바닥은 말없이 천년 동안의 얘기를 여행자에게 건네 온다. 오죽하면 더러운 그 거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통째로 등재되었을까?
어떻게 하면 대구의 거리를 이처럼 낭만과 시정이 넘치게 할 수 있을까. 나무를 심는다? 벽천(壁泉)을 설치한다? 담을 허문 자리에 소공원을 만들어 본다? 아마 그 모두가 필요한 일일 테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래된 거리를 버리지 않는 일이다.
오래된 것 사이로 새 것을 만들 때는 신중해야 한다. 오래된 것이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들여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새것이 헌 것과 어울리는 것인지 깊이 숙고한 뒤라야 한다. 오늘 나는 사라진 거리를 추억한다. 새로 들어 설 비열(卑劣)한 거리는 이 거리의 역사뿐 아니라 나의 추억까지도 파괴해버렸다.
남우선 대구MBC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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